Isadora / Paul Mauriat
이 음악은 `이사도라 던컨`(1878.5.26~1927.9.14 현대무용가)
실제 인물을 묘사한 것
[ 이사도라의 생애 ]
이사도라 던컨은 전통 무용을 배웠으나 점차 예술은 물론이고 개인 생활에서조차 전통과 관습을 거부하는 파격을 보인 인물이다. 영화는 남자 비서에게 자신의 인생을 구술하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관습을 배격하는, 자유분방한 연애와 동거, 개인 생활, 그녀의 춤 모두는 당시 보수적이고 편협한 사람들을 모두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춤은 고대 그리스 무용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맨발로 무대에 선 것으로 유명하다. 재봉틀 거부 파리스 싱어(제이슨 로바즈),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에센닌과의 사랑, 두 아이들의 비극적 죽음 등 그녀의 인생은 성공과 비극적 최후라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다. 이사도라 던컨은 자신의 규칙에 따라 삶을 살았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로운 사고, 현대 무용에 기여한 업적으로 인해 열렬한 찬미자를 거느리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의 전설적인 현대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린 전기 영화로, 이미 1977년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총 5차례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이사도라 던칸 역을 열연, 그해 각종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1968년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뉴욕 비평가상 여우주연상 수상했다
불행하게 Isadora는 1927년 프랑스 니스에서 타고 가던 자동차의 뒷바퀴에 스카프가 끼어 사망했다.
이사도라 던컨(1878년-1927년)
미국 태생의 이사도라 던컨(1878~1927)은 모던 댄스의 개척자로 불리운다. 18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5살 때에는 뉴욕에서 델리의 무대에 출연했다. 그후 1~2년간 자신만의 [무용]을 했으며 관객을 사로잡아 상당한 재산을 모으며 [유럽]과 [북미] 양 대륙에 이름을 떨쳤다. 그녀는 음악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기초 교육을 받았고 아울러 발레도 습득하였다. 가난한 무명의 젊은 무용가로 유럽에 건너갔던 이사도라는 무용의 역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무용에 대한 관객의 개념까지 변화시켰다. 그녀는 태어나면서 부터 자연을 사랑한 반항적 기질이 있었으며, 그래서 인공적인 기법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1897년 18세의 이사도라는 델리단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델리의 주선으로 발레지도를 받았다. 뉴욕으로 돌아온 이사도라는 다시 본판티의 지도를 받았다. 비록 이사도라는 발레가 비 표현적이라하여 반대하였지만, 기본적인 발레지도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인 대중의 견해와는 달리 이사도라는 무대 위에서 얻어지는 순간적인 착상으로 춤추지 않았다. 옷감 선택에서부터 의상 제작, 배경활동 등 모두를 세밀히 준비하였다. 이 점이 그녀의 재능이며, 또한 무용이 가식없이 보이도록 노력하는 의도였다. 자신의 신무용에 대해 명료하고도 능숙한 포용력을 지닌 이사도라는 공상적으로 작품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녀는 1899년 시카고 데뷔 공연 때는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춤을 추었다. 그때까지 기교 위주의 발레밖에 보지 못한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고 놀랐으며 그녀는 무대 의상의 양상까지 변화시켜 이사도라 이후 발레를 포함한 모든 무용수들은 유행에 얽매인 의상보다 적절한 무용의상을 입고자 했다. 그녀는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사도라는 그 해에 파리에서 새로운 무용을 발표해 절찬을 받았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 공연하였다. 그녀의 공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받은 곳이 독일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혁명은 발레에 대한 반항이요, 나아가 그 당시 남자와 여자들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반기였다. 미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이 시작되고 남자와 여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결의가 여성들 사이에서 번져가던 때, 이사도라는 독일의 신무용 탄생에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독일 베를린 근처의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또한 1905년 러시아 방문 공연은 러시아 발레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발레뤼스가 결성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일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인 것이며, 또한 기성의 음악곡으로 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무용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녀는 기법이나 표현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을 주장하였고 무용 예술을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일을 개척하였다. 20세기를 맞을 때까지 독일은 무용면에서는 참으로 빈곤한 나라였다. 그러한 독일의 19세기이후 프리드리히 얀(1778~1852)이라든가 구츠무츠(1759~1839)가 제창한 육체문화운동이 국민 전반에 보급되었다. 물론 이 운동에 영향을 주고 목표를 제시한 사람은 "이사도라"이다. 그 후 독일의 각 도시에서는 수많은 일반인이 이사도라의 신무용을 향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을 신무용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것은 무용적인 보건운동의 영역을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녀의 50회 생일이 다가올 즈음 새로이 알게 된 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러 나가기로 약속한 이사도라는 목에 붉은 빛깔의 스카프를 두르고 언제나처럼 한쪽 같을 끌면서 차에 올랐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이사도라의 목이 젖혀지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사도라는 작품을 미완성 한채 자신의 새로운 춤이 어떻게 규명될 지 모른 채 죽은 것이다. 또한 던컨 무용학교를 전세계에 세우고자 했던 그녀의 꿈도 실현되지 못했다. 그녀는 아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무용이 육체의 동작을 매개로 한 인간 정신의 신성한 표현이라고 한다. 이사도라는 영혼의 춤을 추었고 춤을 종교와 동격으로 두면서 춤을 통한 종교의 무용을 주장했다. 그녀는 모든 속박을 깨뜨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려한 실례로서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를 미국에서 발생한 이 예술의 창시자로 평가하는 것은 그녀의 뒤를 이어 그녀의 독창적인 움직임의 양식을 흉내내거나 발전시킨 루스, 세인트,, 데니스, 도리스, 헌프리, 마사 그라함 등의 거물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클래식 발레의 규범과 인공적인 양식에 반대해서 무용을 인간의 강렬한 표현 형태로 발전 시킨데 있는 것이다. 던컨의 표현은 때로는 너무 천진스러운 것이었지만 1930년대와 1960년대의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활동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여성이고, 여성임을 영광되게 한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그녀의 일을 수행해 나가는 데에 타협을 몰랐던 여성의 표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감독 : 카렐 라이즈
출연 :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제임스
폭스 제작 : 1968년/영국
Paul Mauriat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났다. 9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941년에 마르세이유 국립 음악원을 졸업했다. 이후 아마추어 재즈 밴드를 결성하거나 스튜디오 디렉터, 오케스트라 지휘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65년에 ‘폴 모리아 그랜드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이어 앙드레 포프의 곡을 편곡해 출시한 〈Love Is Blue〉(L'Amour Est Bleu)는 5주간 미국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5백여만 장).
그 외에도 El Bimbo, Toccata, Penelope, Isadora, Nocturne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대한민국과 일본, 중화민국, 홍콩,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69년의 첫 방일과 1975년의 첫 방한 이래 도합 1,200회 이상 공연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민요 ‘아리랑’,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Please return to Pusan port), 채은옥의 '빗물'(Rainwater)을 연주곡으로 편곡하였으며, 1976년에 프랑스에 아리랑을 소개하여 이후에 유럽에 아리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에는 그가 속해 있었던 필립스 레이블에서 일본 포니 케년(Pony Canyon)으로 이적했다.
1995년에는 고베 대지진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연주곡인 Quartet for Kobe(고베를 위한 4중주)를 발표했다. 고베에서 녹음했으며 폴 모리아가 피아노 파트, 레이몽 르페브르가 플릇 파트, 프랑크 푸르셀이 바이올린 파트, 프란시스 레이가 아코디언 파트(정확하게는 반도네온)를 맡았다.
1996년 2월에는 일본 도쿄 히토미 키넨홀에서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그 공연 실황은 포니 케넌이 레이저디스크, DVD, CD로 발매했고, 일본의 BS위성방송사업자인 WOWOW에서 방송됐다.
1998년의 일본 오사카 공연을 끝으로 연주 활동은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폴 모리아는 파리에서 은둔하며 공연 총 감독을 맡았고 그의 악단은 대한민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했으며, Gilles Gambus가 2004년까지 지휘했고 2005년부터는 Jean-Jacques Justafre가 지휘했다.
2002년에는 저술가이자, 코멘테이터인 Serge Elhaik가 폴 모리아의 삶을 다룬 Une vie en bleu(A life in blue)를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발간했다.
2006년에도 그의 오케스트라가 한국과 일본에서 공연을 할 계획이었으나 그의 사망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2006년 10월 말, 프랑스 남부 페르비뇽의 별장에서 체제중, 컨디션 불량을 호소해 검사 및 입원했는데, 급성 백혈병인 것이 판명되었다.동년 11월 3일 오전 1시, 급성 백혈병에 의한 심부전 때문에 페르비뇽의 병원에서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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