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사모곡 - 태진아

청가헌 (聽可軒) 2022. 3. 29. 15:06

사모곡 / 태진아

앞산노을 질때까지 호미자루 벗을삼아 화전밭 일구시고 흙에살던 어머니
땀에 찌든 삼배적삼 기워입고 살으시다 소쩍새 울음따라 하늘가신 어머니
그 모습 그리워서 이한밤을 지샙니다

무명치마 졸라매고 새벽이슬 맞으시며 한평생 모진가난 참아내신 어머니
자나깨나 자식위해 신령님전 빌고빌어 학 처럼 선녀 처럼 살다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자나깨나 자식위해 신령님전 빌고빌어 학 처럼 선녀 처럼 살다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 본명    조방헌 (曺芳憲)
  • 출생    1953년 2월 16일(음력 1월 3일)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 본관    창녕 조씨
  • 학력    관기초등학교 (졸업)[4]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 / 학사)

  • 신체    174~175cm, 68kg, B형
  • 가족    누나 조남순, 남동생 조방원 
  • 배우자  이옥형 
  • 자녀    장남 조유명,  차남 조성현 
  • 종교    불교 → 개신교(예장통합) 
  • 소속사  진아엔터테인먼트
  • 데뷔    1973년 〈추억의 푸른 언덕〉

1. 개요

대한민국의 대표 트로트 가수이다.

 

예명인 '태진아'는 배우 태현실의 태, 가수 남진의 진, 가수 나훈아의 아를 따와 지었다고 한다. 무명 시절 지방 공연을 갔다가 그의 본명을 들은 작곡가 서승일이 조방헌은 너무 평범하고 촌스러우니 예명을 지으라고 해서 지금의 예명이 탄생했다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은 후 옥경이, 거울도 안보는 여자, 미안 미안해가 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트로트 가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대표곡으로는 '옥경이', '노란 손수건', '미안 미안해', '거울도 안 보는 여자', '선희의 가방', '장미와 우산', '사모곡',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동반자', '잘 살거야', '사랑은 돈보다 좋다', '일 나겠네', '진진자라', '아줌마' 등이 있다.

2. 생애

1953216일에 충북 보은군에서 4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 가난한 집안 형편[13]때문에 국민학교[14]만 겨우 졸업하고 14살이던 1966년에 상경하여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살다가 작곡가 서승일에게 발탁되어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1973, 노래 '추억의 푸른언덕'이 흥하면서 신인상을 휩쓸었으며, 1975년에 불륜 사건으로 구속된 흑역사가 발생했다. 불륜 대상은 20살 연상이던 현대건설 조성근 사장의 아내 김보환[15]으로, 태진아와 만날때마다 용돈조로 몇백만원씩 주며 만남을 이어오다 결국 조성근 사장이 형사들을 대동하고 여관에 쳐들어가 현행범으로 검거되었으며, 조성근 사장은 태진아를 고소했다가 이후 합의이혼을 하며 고소를 취하하여 구속에서 풀려났다.

 

불륜으로 인해 한동안 연예협회 가수분과에서 제명되어 낙향한 뒤 '이쁜이들'이라는 여성 듀엣의 음반에 기획자로 나섰다. 이 시기중 어느 한 시기에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쳤다.

 

그 후인 1980, 다시 가수 복귀를 꿈꿨지만 과거 일 때문에 방송 출연 금지를 먹어, 미국으로 가서 먼저 정착해 있던 선배 가수 송대관의 도움으로 교포 사회의 밤무대 활동 등을 하며 가정을 꾸렸다. 19841, 방송 출연 금지가 해제되자 한국에서 음반을 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를 반복하던 중, 89'옥경이'가 히트를 친 다음 90년에 '거울도 안보는 여자'가 가요톱텐에서 골든컵을 수상한 다음 후속곡인 91'미안 미안해' 역시 여러 번 1위를 할 정도로 히트하면서 송대관, 설운도, 현철과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이 되었다.

 

2010년에는 송대관 후임으로 제5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으로 취임했고,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을 적극적으로 나서 중재를 해서 사태를 안정시켰다. 덕분에 카라의 팬덤 카밀리아에서는 태진아를 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감사하고 있다. '진아기획'이라는 음반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양자 조유명이 설립한 자회사 'YMC엔터테인먼트'라는 매니지먼트 회사가 존재하며, 양쪽 소속 가수가 동일하다.

3. 여담

  •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해 물로 배를 채우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도시락 없이 가는 건 물론이요 명절때 고기 한 번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66년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중식당 배달 직원 일을 했지만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배달을 하려 들고 가던 군만두를 먹었다가 어떻게든 수를 써서 돌려막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들통나서 중식당 사장에게 크게 혼나기까지 했다.
  • 송대관과 방송에서 라이벌 겸 앙숙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절친한 사이다. 티격태격하는 것은 기믹이고, 실제로는 서로 자가용도 빌려줄 정도로 깊은 우정을 자랑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송대관과 태진아처럼 겉으로는 서로 티격태격 하지만 실제로는 친한 사이인 사람들에게 'X진아-X대관'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한다.
  • 이호연 DSP미디어 대표이사와는 그가 살아생전에 친분이 깊었다. 애초에 이호연이 연예계에 발을 들여서 제일 처음 했던 것이 태진아의 매니저였으며 이게 인연이 되어 각자 가는 길을 달랐지만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호연이 운영하는 DSP미디어에서 카라 사태가 발생하자 태진아가 중재했다.
  • 부인의 이름이 '이옥형'인데 왜 태진아 노래의 제목은 '옥경이'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태진아도 실제로 아내의 이름을 '이옥경'으로 잘못 알고 있었으며, 혼인신고를 하면서 제대로 된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부부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부인인 이옥형 씨도 마찬가지로 태진아에게 '조방헌'이란 본명이 따로 있다는 것을 혼인신고를 하면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둘 다 서로의 본명도 모르고 연애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 신혼 초 미국에 살 때 장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당시 장모의 집은 원룸이었다고 한다. 태진아는 방 한쪽에 커텐을 쳐놓고 살았는데, 이때 이루가 생겼다고...
  • 아들 이루도 가수로 데뷔했으며,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대박을 쳤다. 대신 장르는 다르다. 그리고 아들은 현재는 가수 활동보다는 배우 활동이 더 많다.
  • 선술하였듯이 카라 팬클럽인 카밀리아에서는 신으로 숭배받고 있는데, 전속 계약 문제로 난리가 난 카라 해체를 막는 데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덕분이다.
  • 1996년 말에는 김자옥을 위해서 <공주는 외로워>[22]라는 곡을 제작한 적이 있다.
  • 1997년, 본인의 소속사에서 발굴한 보이그룹 에이알티를 데뷔시켰으며, 데뷔곡 '슬픈 얼굴'이 가요톱텐 차트에서 5위까지 올라가면서 선전했고, 그 뒤로도 많은 곡들을 남겼다.
  • 동반자로 동방신기 팬을 낚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당시 상황을 방송에서 이야기 했는데 의도적으로 한 낚시라고 한다. 원래 보통 행사 레퍼토리는 동반자를 제일 처음에 불렀는데 이 날 동방신기 팬들이 쫙 깔린걸 보고 의도적으로 순서를 제일 마지막으로 돌려 3번째에 배치시켰다고 한다. 게다가 '반'의 발음도 일부로 뭉개서 '방'과 헷갈리게 발음했다고.
  • 비의 'La song'과 태진아 본인의 동반자를 매시업 한 영상들이 인기를 끌면서(해당 영상 중 하나) 두 명이 한 무대에 같이 선 적이 있다. 비진아 인기가요 버전 당시 비는 연예병사 논란이 컸고 'La song' 곡 자체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곡의 후렴구가 어딘가 태진아의 창법과 유사해서 이를 이용한 패러디 영상이 인기를 끌자, 비가 아예 태진아와 듀엣 공연을 한 것이다. 이 병맛 공연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대성공했으며 이후 실제로 리메이크 버전이 태진아의 앨범에 수록되었다.
  • 오버워치의 영웅 캐서디의 스킨 중 하나인 자경단원이 태진아의 노란 정장과 닮았다고 하여 태진아라는 별명이 붙었다.
  • 2013년 연말 MBC 가요대제전에서 BTOB를 인피니트로 잘못 부르는 실수를 했다. 점점 당황하는 정일훈의 표정이 압권이다. 영상 1분 59초부터.
  •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한 적이 있다.
  • 2010년 가을, 무명 작사가였던 최희진이 허위글을 올려 태진아 본인과 아들 이루 모두 한동안 마음고생을 한 적도 있다. 기사. 이후 최희진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기사. 하지만 이 사태 때문에 태진아도 이루도 이후로 모두 이미지들이 조금 안 좋아졌다.
  • 2015년에는 억대의 도박을 했다는 잘못된 설로 또 한동안 곤욕을 치렀고, 이에 대해 본인이 결정적 증거를 보이면서 직접 해명했다. 본의 아니게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이 사진들이 주로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사.
  • 엠아이인터랙티브(MI Interactive)에서 만든 지지보이스라는 보이스 어플의 쇼케이스가 강남구에 있는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에서 열렸으며 여기에 아들 이루와 함께 참석했다. 지지보이스 런칭행사 이야기,
  • 김혁규 전 경남지사를 양아버지처럼 여긴다. 미국에 건너가서 한창 고생하고 있을 때 뉴욕한인경제연합회장이자 사업가였던 김혁규가 그를 물심양면껏 지원해 줬기 때문에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태진아의 의붓아들 조유명의 결혼식 때도 김혁규 전 지사가 주례를 서줬다. 태진아 역시 김혁규가 경남지사 선거에 나갈 때마다 지원 유세를 해줬고,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을 역임하던 시절에는 태진아가 김혁규 후원회장을 맡았던 바 있다.
  • 보은군·옥천군·영동군·괴산군을 지역구로 하는 미래통합당(後 국민의힘) 국회의원인 박덕흠과는 친분이 있다. 본인의 고향이 박덕흠 의원의 現 지역구이기도 하다.
  • 무대 의상은 항상 두 벌을 제작한다고 한다. 장지기장 활동 당시 강남과 옷 사이즈는 물론 신발 사이즈까지 맞아서 활동 내내 강남은 태진아의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고...
  •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해 우유 콜라 라면이라는 괴악한 라면 조리법을 소개해 큰 이슈가 되었다. 방송에서 먹어본 이들과 일부 따라해 본 시청자들은 얼큰하면서 달달하다며 호평했지만, 그 외의 대부분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이를 직접 따라해본 사람들 혹은 스트리머들은 토할 것 같다는 후기. 아마도 방송만으로 정확한 레시피를 알 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 건물주 연예인 중 한 명이다. 2013년 여름에 아들과 함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에 위치한 5층 건물을 구입하였다. 1년 사이 7억원의 시세차익을 얻었으며, 부동산 전문가에 따르면 태진아 명의 건물은 도로가에 위치해 있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시세가 약 50억원으로 추정된다고... 현재 이 건물의 1층에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으며, 1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은 태진아가 사장으로 있는 진아기획, 태진아의 장남 겸 의붓아들인 조유명이 사장으로 있는 스윙엔터테인먼트 및 이루기획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 상술한 카페 겸 레스토랑에는 각종 화환과 태진아 본인을 포함한 소속사 가수들의 사진들이 즐비하며, 종종 나타나 손님들을 접대하기도 한다. 사진이나 사인을 요청하면 흔쾌히 응하는데, 푹푹 찌는 한여름에도 긴팔에 롱코트 차림을 고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 태진아는 강남에게 이상화와 결혼을 할 경우 3,000평 땅을 준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 실제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해 화제를 모은 바도 있다.
  • 현진영에 따르면 임재범, 전인권과 함께 1990년대 가요계 군기반장 3대장에 속했다고 한다. 해당 영상. 정확히는 항상 웃는데 속을 알 수 없어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 영화 마강호텔에 본인 역으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04년 9월 11일 오후 7시에 공연 스케줄로 인해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전라북도 고창군으로 이동하던 중 부안톨게이트 부근에서 사망할 뻔 했던 대형 교통사고가 났는데, 그날따라 비도 많이 오는데다가 공연도 무려 4곳이나 잡혀있는 등 스케줄이 매우 빡빡해 이 상태에서 속도를 높이면 수막현상이 발생해 사고가 날 수 있어서 당시 매니저인 김모(당시 39세)씨가 당시 상황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가속을 할 수밖에 없어 빗길에 가속을 했지만 이때 빗물에 타이어가 떠버리는 수막 현상으로 차가 미끄러져 도로를 탈선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3바퀴 이상을 돌아 언덕 밑 낭떠러지로 추락했고, 그 밑으로 심어져 있던 나무의 가지 사이에 차가 걸렸는데, 사고의 충격으로 차는 폐차 수준으로 완파되었지만 타박상 정도에 불과한 상처만 입었다.
  • YMC 엔터테인먼트 설립자라 인스타그램에 워너원 멤버들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게시물도 올렸었다. 해체 후에도 마찬가지로 워너원이 그립다는 게시물을 올리고 있다.
  • 현재랑 마찬가지로 아이돌에 관심이 많아서 나오는 팀들마다 전부 응원하고 홍보를 많이 하였다.

4. 이박사와의 악연

이박사의 팬들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다.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광대라고 폄하한 것 때문에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실제로도 이박사와 그의 주요 장르인 뽕짝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일례로 2014년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여한 Mnet 트로트 엑스에서 이박사가 참가자 자격으로 무대를 펼치자 정말로 짜증이 가득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장르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아티스트로서 그다지 좋게 볼 수는 없는 태도다. 얼마나 대놓고 짜증을 냈는지 옆에 있던 설운도가 이박사를 좋게 봐 주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주저할 정도. 이 때 이박사 또한 태진아를 향해 삿대질을 날렸고, '디스코를 잘 추며 잘 노네' 부분에서 급발진 버럭을 외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실 이는 태진아 VS 이박사 간의 가요계 내 신경전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다. 그러나 이 때를 제외하면 이박사 쪽에서 특별히 태진아를 비난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상 태진아의 일방적인 혐오라고 보는 것이 옳다.

태진아가 이박사와 뽕짝을 대놓고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기에 태진아는 뽕짝 앨범을 내지 않았을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오히려 태진아도 뽕짝 앨범을 세 장이나 낸 적이 있다. 뽕짝은 사실 트로트 메들리로 부르는 게 맞으며, 트로트 메들리를 흔히 '뽕짝 메들리', '관광버스 메들리'라고도 한다. 트로트 메들리를 좀 정겹게 이름 붙인 게 뽕짝인데, 무명 트로트 가수들은 메들리 음반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며, 지금은 유명한 유명 트로트 가수들 중에도 이러한 메들리 음반을 내는 경우가 있다. 태진아도 '끝내주는 디스코 메들리'라는 이름으로 음반 석 장을 냈었다. 현재 한국에서는 1960년대의 정통 트로트에서 갈려진 '블루스 트로트', '발라드 트로트', '락 트로트'가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고, 2000년대 이후 댄스 트로트, 세미 트로트 등도 연달아 등장하여 젊은 층의 인기를 얻게 되자 인기=정통이라는 인식으로 자신들을 이른바 '정통 트롯'이라며 자화자찬하며 다른 트로트 장르들인 올드 트로트, 엘레지 트로트, 국악 트로트, 뽕짝, 품바, 각설이 등을 오래되고 수준낮은 트로트 장르라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뽕짝이 태진아를 위시한 현 트로트 업계에서 대놓고 무시당하게 된 이유는 무시당하던 다른 트로트 장르들은 점차 인기가 줄어들어 사실상 사장되었다면 뽕짝은 흥이나는 창법이 관광업의 성장과 맞물려 함께 성장하여 살아남았고 뽕짝으로 유명한 이박사가 일본에 진출하여 대박을 거두며 일본에서도 현지 교민 외에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매니아 층이 생기며 하나의 장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뽕짝을 좋아하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상당수 존재하기에 한국의 현 트로트 업계에서 뽕짝을 무시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의견도 많고, 현재 인기 트로트 가수들 중에서도 뽕짝 메들리로 유명한 가수들로는 김용임, 진성, 박구윤 등이 있다. 뽕짝이 한국에서 인기가 없는 트로트 장르라면 뽕짝은 진작에 취급하는 가수들이 없이 사장되어 명맥을 유지 못 했을 것이지만, 뽕짝은 이박사의 전유물이 아닌 유명한 트로트 가수들도 취급한 장르로 발전하는 중인데도 태진아를 위시한 트로트 가수들이 뽕짝을 무시하는 이유는 현 트롯 업계에서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정작 일본에 진출하였을 때 엔카의 굳건한 인기 속에 맥을 못춘 것과 달리 뽕짝은 일본에서도 성공했으며 그 외에 중국, 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평소 한국에서 자신들이 관광음악이라고 무시하던 뽕짝이 다른 국가에 진출하여 발전하며 한 장르로 자리잡자 그에 대한 반감으로 '뽕짝'을 더욱 홀대하며 아예 트로트가 아니라는 식으로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해졌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뽕짝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진아도 정작 뽕짝으로 음악을 시작했으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다른 트로트 장르로 갈아타고는 뽕짝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다며 한국의 몇몇 트로트 가수들과 같이 뽕짝을 이박사가 일본에 선보여 성공한 것에 시기하여 무시하는 것이라는 의견 또는 자신이 신인 시절 뽕짝 메들리 앨범을 여러 장 낸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자신이 앞장서서 뽕짝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의견이 있다. 한국에서 자신이 트로트 가수 신인 시절 뽕짝으로 활동하다가 다른 트로트 장르로 바꿔서 활동하면서 뽕짝을 대놓고 무시했는데, 이박사는 뽕짝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일본에 진출하여 인기 장르로 자리잡았기에 질투심, 수치심과 모멸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라는것이 의견에 대한 근거라고 보고 있다. 태진아가 무시하던 이박사는 일본에 진출하여 후지테레비의 HEY!HEY!HEY!2번째로 출연한 외국인 가수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니코니코 동화에 올라오는 그의 영상에는 한국인에게 흔히 붙는 비하나 욕이 전혀 달리지 않으며 애초에 영상에 붙는 태그가 '한국을 싫어하는 나도 인정하는 한류 슈퍼스타'일 정도로 인기를 얻게된다. 일본에서 뽕짝이 트로트의 한 장르로 자리잡자 일본에서는 한국의 다른 트로트 장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박사가 다른 한국 트로트 장르 가수들의 일본 진출을 도운 셈이다. 이박사를 염두한 듯 태진아는 정통 한국 트로트를 일본에 보여주겠다며 호언장담하며 일본에 진출했지만, 한국에서는 태진아가 인기 트로트 가수이나, 일본에서는 별로 인지도가 없다. 일본에 자신의 곡들을 선보였지만, 사실상 망했다. 태진아, 서 굴욕?"관객 2명 앞에서 노래" 눈물 펑펑이라는 기사 헤드라인처럼 트로트 한류를 만들겠다며 호언장담하고 일본에 진출했지만 실패한 흑역사가 있는데, 이박사는 일본에 진출한 직후부터 뽕짝 스타일의 흥겨움으로 승부를 걸어 성공했다. 태진아나 이박사나 모두 일본 진출의 시기는 달라도 진출할 당시에는 인지도가 없었는데, 이박사는 성공리에 안착한 반면 태진아는 실패했으니 태진아의 일본 진출 실패가 더욱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태진아가 일본에서 실패한 이후부터 더욱 이박사나 뽕짝을 무시하는 태도의 강도를 높인다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태진아가 뽕짝을 무시하는 태도와 별개로 한국에서는 과거보다 더 뽕짝을 다루는 트로트 가수들이 늘면서 뽕짝에 대한 편견들도 상당수 사라지면서 과거 지나치게 뽕짝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 나쁘다는 인식이 늘어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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