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 I Do, I Do, I Do, I Do / ABBA (1975)
Love me or leave me, make your choice but believe me
I love you
I do, I do, I do, I do, I do
I can't conceal it, don't you see, can't you feel it
Don't you too
I do, I do, I do, I do, I do
Oh, I've been dreaming through my lonely past
Now I just made it, I found you at last
So come on, now let's try it, I love you, can't deny it
'Cos it's true
I do, I do, I do, I do, I do
Oh, no hard feelings between you and me
If we can't make it, but just wait and see
So come on now, let's try it, I love you, can't deny it
'Cos it's true
I do, I do, I do, I do, I do
So love me or leave me, make your choice but believe me
I love you
I do, I do, I do, I do, I do
I can't conceal it, don't you see, can't you feel it
Don't you too
I do, I do, I do, I do, I do
날 사랑하든가 아니면 떠나든가, 당신 맘이지만 날 믿어봐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숨길 수가 없어요. 안 보여요? 안 느껴져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난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오, 그 외롭던 지난 날들 난 꿈꿔왔어요
이제 그 꿈이 이뤄져, 나 드디어 당신을 찾았어요
그러니 어서, 노력해 봐요, 나 당신을 사랑해요, 부인할 수 없어요
사실이니까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오, 당신과 나 사이에 풀기 어려운 감정은 없어요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그냥 좀 기다려봐요
그러니 어서, 노력해 봐요, 나 당신을 사랑해요, 부인할 수 없어요
사실이니까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날 사랑하든가 아니면 떠나든가, 당신 맘이지만 날 믿어봐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숨길 수가 없어요. 안 보여요? 안 느껴져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난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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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다고 그렇다고 그렇다고 다섯 번이나 강조하는 노래 I Do, I Do, I Do, I Do, I Do이다. ABBA는 1975년 3집 앨범 ABBA를 발표한다. 그 앨범에서 첫 싱글 앨범으로 내놓은 게 So Long인데, 그 노래는 기대와 달리 흥행에 실패한다. 그리고 두번째 싱글 앨범으로 내놓은 게 지금 이 노래. 근데 이 노래가 호주에서 처음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며 ABBA 매니아들까지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뉴질랜드, 스위스 등지에서도 팝 싱글 차트 1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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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 스웨덴 스톡홀름
- 멤버 벤뉘 안데르손 (보컬·피아노·키보드)
비에른 울바에우스 (보컬·기타)
안니프리드 륑스타 (보컬)
앙네타 펠트스코그 (보컬)
- 장르 유로팝, 팝 록, 디스코
- 활동 1972년 – 현재
1. 개요
스웨덴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팝 그룹이며 대중음악 역사상 영향력 있고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 중 하나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당대의 전 세계 음악계를 휘어잡은 전설이며 스웨덴이 자랑하는 네 가지가 비에른 보리, 볼보와 스카니아 그리고 ABBA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또한 그들의 음악은 세대를 초월한 뛰어난 음악으로 인해 대중음악계의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다.
2. 음악 스타일
ABBA의 팝은 대다수의 현대 히트곡과는 달리 R&B, 힙합, 소울 음악, 펑크, 라틴음악의 영향, 즉 백인이 아닌 음악적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울바에우스는 1981년 인터뷰에서 "우리의 음악적 뿌리는 유럽인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노래를 좋아합니다."라고 그들의 접근 방식을 다소 깔끔하게 요약했다. "이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에서는 아마도 우리의 노래가 잘 통할 겁니다. 미국에서는 팝 음악이 블루스, 소울 음악, 가스펠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는 ABBA의 유산에는 없는 것일 겁니다."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스웨덴 전통 민속음악과 슐라거 음악에서 자랐다. 이 음악은 독특하게 대륙적인 유럽풍의 팝 음악으로 엉성하고 단순한 음악이다. 그리고 그들의 취향이 10대로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거의 독점적으로 남아 있는 영향의 네트워크를 개발했다: 비치 보이스의 황금 십대 찬송가,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 레논-매카트니의 Rubber Soul, 클래식 음악, 그리고 뮤지컬 극장. 성숙한 작곡가와 작사가로서 결정적인 멜로디, 아찔한 편곡과 대위, 그리고 지나치게 과장된 감정적 제스처를 선호하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영향의 혼합은 이 밴드가 정제되지 않은 감상주의 공급자로서 명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ABBA는 지적이고 음악적인 단순함을 가장한 팝의 극대주의를 대표했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보다 문화적으로 더 멀리 떨어진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연구하고 학구적인 수의 정확성으로 재구성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슈퍼그룹으로 이해한 것을 하나로 모으기 전에 각 멤버들은 상당한 지역적 성공을 거두었다. 키보드 연주자 안데르손은 ABBA를 "스웨디쉬 비틀즈"로 만들며 히트곡을 썼다. 기타리스트 울바에우스의 후테난니 싱어즈도 스웨덴어로 된 커버와 미래의 스타가 되어 작사를 썼고, 결국 이 둘은 서로의 밴드에 기여했다. 울바에우스의 미래의 아내인 펠트스코그는 스스로 쓴 schmaltz로 10대 소녀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두 사람은 70년대 초반 그녀의 솔로 프로듀싱에 함께 일했고, 안데르손은 비슷한 펜으로 그의 파트너인 륑스타를 위해 홈통 히트곡을 제작했다. 네 사람 모두가 재능과 경험을 모아보니 결과는 빽빽하게 채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대인들은 처음에는 외부 프로듀서/송라이터에 의존했지만, ABBA는 대체로 자급자족적이었다. 매니저 스티그 앤더슨의 약간의 영어를 보조해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그들만의 가사를 썼다. 그들은 스틸리 댄과 함께 연주했던 것과 같은 숙련된 세션 음악가들과 함께 그들을 편곡하고, 제작하고, 노래하고, 공연했다. ABBA는 대부분의 MTV 이전 공연자들보다 더 많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투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녹음실은 그들의 집이었고, 그들은 스톡홀름의 폴라 스튜디오를 지은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퀸과 10cc처럼 ABBA는 새롭게 확장된 멀티 트랙 레코딩의 교향곡과 합창의 가능성을 악용한 배열을 빠르게 구축했다. 직설적으로 보이는 고리의 풍부한 질감 렌더링은 "이렇게 싸게 보이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돌리 파튼의 공리와 맞먹는 것이었다.
자꾸 귓전에 맴도는 곡조에 대가인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쓴맛과 단맛이 뒤섞인 상당한 조화 복잡성을 자랑했다. 모타운의 클래식 작사가들처럼 아픈 가사("S.O.S," "Money, Money, Money")로 날카로운 멜로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뛰어났고, 때로는 정반대의 조합("I Have a Dream," "Chiquititita")으로 슬픈행복함에 빠져들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의 가장 행복한 히트곡들에도 몇 가지 이상의 블루 노트가 포함되어 있다. "댄싱 퀸"의 희열적인 현악과 리듬을 벗겨내고 그들의 유일한 미국 차트 토퍼는 훨씬 슬픈 곡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황홀함을 느끼도록 배열되어 있다. 하모니가 'Feel the beat from the tambourine, oh yeah' 후렴구절에 맞춰 최고조에 달할 때, 음 사이의 프리송은 가사에 불균형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삶은 그들의 상황보다 훨씬 더 큰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노래방에서 그것들을 시도했던 여러분 중 누구나 이미 알고 있듯이, ABBA의 클래식들은 도전적일 수 있다. 이것은 메릴 스트립이 아닌 ABBA의 주크박스 뮤지컬 맘마미아!의 영화 버전에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펑크와 힙합은 많은 현대 팝의 멜로디적 복잡성을 거의 감소시켰는데, 특히 이 시구들에서는 곡이 현재 한계 간격 내에 있는 소수의 음표들 사이에서 잘 조율되는 경향이 있다. ABBA의 구절은 오늘날의 전형적인 후렴구보다 상당히 멜로디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그들은 소프라노 펠트스코그와 메조소프라노 륑스타가 각각 일반 록커들보다 더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어졌다. 종종 온전한 합창단으로 개조된 그들의 목소리는 프레디 머큐리가 퀸의 가성소리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와 초인적인 조화를 이루었을 때와 같이 그들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정렬되었다.
그야말로 팝 음악의 마스터라고 해도 될 정도로 완전체 스타일의 팝 음악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ABBA의 네 명의 음악가들과 그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앤더슨과 함께한 공동 음악 기간 전에도 자신만의 음악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ABBA는 광범위한 음악 레퍼토리가 알려져 있다. 또한, ABBA의 모든 아티스트들은 상업적인 엔터테인먼트 음악의 다양한 스타일들의 디자인, 작곡, 제작, 해석하는 데 수년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ABBA의 멤버들은 이미 그들 자신의 곡을 썼었지만, ABBA에서는 오직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올바에우스만이 송라이팅 팀을 구성했는데, 특히 벤뉘 안데르손은 작곡을 하고 비에른 올바에우스는 가사를 썼다. ABBA의 음악적 롤 모델은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치 보이스였다. 또한 옛 스웨덴 전통 민요들#, 그리고 고전 작곡가 모차르트, 베르디, 바흐도 그들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 ABBA는 더 풍부하고 깊은 멜로디를 만들어내기 위해 보컬과 인스트루먼트를 층층이 쌓아 올린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 철학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ABBA의 독특한 사운드는 당대 최고의 팝 사운드로 여겨졌으며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오늘날에도 ABBA의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으로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상업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모국인 스웨덴의 경우에 더 그랬다. 음악학자인 Per F. Broman은 "ABBA의 문제는 실력이나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업적이라는 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업성이 강한 이지 리스닝 음악이 ABBA가 추구했던 장르였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70년대 전성기 당시 ABBA를 무시하기도 했다.[6] 그러나 해체된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ABBA의 생명력이 꺼지지 않자 ABBA를 긍정하는 평론가들도 많이 생겼으며, 2010년에는 그 영향력을 인정받아 팝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7] ABBA는 그룹 경력 이전에 다양하게 활동했던 음악적 배경 때문에, 초기 몇 년 동안 다양한 음악 장르들을 꾸준히 실험했다. 대표적으로 'People Need Love'나 'He Is Your Brother'와 같은 초기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의 'Flower-Power- 시대'의 영향을 여전히 들을 수 있다. ABBA는 'Hasta Mañana' 같은 슈팅발라드에서부터 'Honey, Honey', 'I Do, I Do, I Do, I Do, I Do'와 같은 레게 팝과 트로피컬 러블랜드 스타일의 팝 음악에서부터 'Waterloo'나 'So Long' 같은 록 노래까지 다양한 팝 음악들을 다루었다. ABBA는 또한 'Watch Out', 'Sitting In The Palmtree', 'King Kong Song' 같은 뛰어난 곡들을 제작했으며, 또한 다소 실험적인 팝을 제작했다. 1975년 3월에 제작된 'S.O.S'와 'Mamma Mia'는 결국 ABBA 특유의 고유한 음악 스타일을 찾게 만들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꾸준히 팝으로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 콤비의 콜라보레이션 과정은 종종 "영감적이고 극대주의적", "완전 완벽주의"로 묘사된다. 작곡하기 위해, 두 음악가들은 주로 스톡홀름의 작은 샤이어 섬 비고스에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음악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악기(기타와 피아노)에서 악기의 하모니로 몇 시간 동안 함께 연주했다. ABBA는 가끔 간단한 영어 단어나 구절을 불렀지만, 그 효과는 어떤 노래인지 구상하기 위해서 임시로 하는 것이고 나중에 나온 노래와 거의 맞지 않았다. 둘 다 흥미롭고 직관적인 접근 방법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것을 완성할 때까지 노래를 계속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올바에우스는 악보를 읽고 쓸 수 없었고, 그들의 새로운 곡들을 작곡/작사하여 나중에 그들을 도와주는 스튜디오 레코딩 프로듀서들이 더 많은 것을 위해 가사들을 외울 수 있게 하였다. 이 방법에 대해, 두 아티스트들은 나중에 "작품들은 이미 태어날 때 그것을 잘 기억할 수 있을 때에만 정말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ABBA는 멜로디를 결합한 후, 울바에우스는 주로 그 멜로디에 맞는 기본 텍스트를 썼다. 울바에우스는 각각의 단어와 가사를 멜로디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여 언어의 멜로디가 그 노래의 멜로디와 크게 일치하도록 하였다.
스웨덴어가 모국어인 울바에우스는 매니저 스티그의 도움을 받아 영어 텍스트를 완성한 후, 여전히 모국어에 의해 필요할 경우 검토되었다. 그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은 초기에는 음악의 일부 관여했다. 일부의 노래 가사나 일부 가사의 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초기 커리어에, 단순하고 때로는 도전적이지 않은 가사들인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올바에우스는 보다 도전적이고 때로는 심오한 작사를 했다. 'The Winner Takes It All'의 가사는 그의 최고작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노래를 종종 ABBA의 두 커플의 관계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의 삶과 유사함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올바에우스에 따르면, 그 노래는 그가 작사한 유일한 자서전 노래라고 한다. 부모의 관점에서 자신의 자녀들의 빠른 성장을 주제로 한 감성적인 발라드는 그의 딸 린다에게 바쳐졌다. 비록 그들의 노래에는 스트록과 레프레인이 간단한 변화로 따르는 전형적인 기본 구조가 있지만, 이러한 구조를 완성한 노래 'Intermezzzo No.1'에서 그들의 작곡 능력을 들을 수 있다. 또한 'The Name of the Game'와 같은 노래들은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곡을 작곡하게 된다. 제작 과정에서, ABBA는 결국 그들의 곡과 소리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악기들 외에도 다양한 전자기타, 베이스 기타, 피아노, 드럼으로 구성된 안데르손과 울바에스는 기존의 오케스트라의 악기와 다양한 사운드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전자 음악을 추가했다.
그들의 음악적 동반자인 음향 엔지니어 마이클 B는 정교한 스튜디오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테이프에 음성과 악기를 녹음하여 다양한 곡의 변형을 만들었다. 일부 소리 요소를 느리게 하거나 시간을 약간 단축시켰다. 그는 미국 음악 프로듀서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따라서, ABBA 노래에는 이러한 제작 기술을 알지 못하면 절대 카피 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소리 요소가 생겼으며, 따라서 그들의 노래들은 독특하고 특이한 소리를 얻게 되었다. ABBA는 현대 스튜디오 기술이 ABBA 음악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타이틀 제작에 항상 많은 돈을 투자했다. ABBA는 유명한 녹음 스튜디오로 가서 1977/1978년에 스톡홀름에 있는 폴라 뮤직 스튜디오(Polar Music Studio)라는 자신만의 녹음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미국 시장에서 더 성공적이고 초기 '80년대 팝'의 전형적인 소리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몇몇 녹음들을 위해 마이애미에 있는 크리트리아 스튜디오에 가서 최고의 음악 프로듀서들과 협력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ABBA는 현재 스튜디오 기술의 최신 수준인 높은 엔터테인먼트의 음악을 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음악이 이미 녹음된 노래와 너무 비슷했을 때, 그 곡은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ABBA의 미공개 노래 리스트이다.[8] 그들의 예술적 창조와 정교한 제작 방식으로 인해, ABBA는 오늘날 현대 대중 음악의 개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3. 세계적인 성공
이 스웨덴 그룹은 40년 전 10월 세계무대에 뛰어들었고 여전히 가장 성공적인 밴드 중 하나이다. 70년대 후반 상업적으로 절정에 달했던 ABBA는 볼보 다음으로 스웨덴 수출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영어권 밖의 다른 나라에서의 음악가의 전례 없는 인기였다. 한편, 현재 전세계 5400만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공연되고 있는 맘마 미아 주크박스 뮤지컬에 의해 엄청나게 활성화되고 추진되어, 이 밴드의 음반은 계속해서 팔리고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악은 기이한 변칙으로 남아 있는데, 록 음악과 R&B의 난폭하고 성적인 공용어가 아닌 보다 가정적이고 절제된 유럽적 가치에 바탕을 둔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사운드이다. 로큰롤이 탈출과 아웃사이더 세계에 관한 것이라면 아바의 팝송은 결코 반항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꿈과 실망을 발굴한다. 댄싱퀸(Dancing Queen)의 소란스러운 황홀감이나 위너 테이크스 잇 올(The Winner Takes It All)의 계단식 운명론에서 요약하면 교외지역의 희망과 두려움은 그 못지않게 서사시적이고 타당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 BBC, ABBA는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가?
비영어권 그룹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최초의 그룹이다. 또한 대중음악 사상 가장 성공한 혼성 그룹이기도 하다. 이들의 총 판매량은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억 5,000만장이며, 아티스트의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는 또 다른 매체인 차트마스터(Chartmasters)에 의하면 1억 5,956만장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판매량은 전세계 아티스트 음반 판매량 순위에서 상위 20위안에 드는 대기록이다. 또 ABBA의 대단한 점은 그들의 음악이 그 시대의 국한된 인기가 아닌 시대를 초월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ABBA의 인기는 상업적인 측면 외에도, 이전과 이후에도 ABBA와 같은 유사한 성공을 거둔 스웨덴이나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다른 밴드가 나오지 않고 있다. ABBA 이전의 스웨덴의 음악가의 성공은 1950년대 이후 대부분 그들의 나라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국제 음악 시장, 특히 영어 음악 시장에서 성공 할 수 있었던 이유는 ABBA의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과 멤버 벤뉘 안데르손, 비에른 울바에우스의 빠른 판단에 나올 수 있었던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ABBA는 폭 넓은 국제적인 팬들의 명성을 얻기 위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하는 것이 빠르게 목적지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처음 몇 년 동안 ABBA의 많은 히트곡들이 등장했다. 스티그 안데르손은 매니저로서 전 세계를 발판을 이용하여 모든 시장에서 싱글곡들을 선보였다. 1973년, 그들의 조국인 스웨덴 밖에서의 첫 번째 성공이 스칸디나비아와 베네룩스 국가들에서 두드러졌고,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이후, 특히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영국, 호주, 프랑스에서 ABBA의 성공은 어마어마했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아일랜드, 뉴질랜드와 같은 중소 음악 시장에서도 ABBA는 부분적으로 큰 차트 및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 ABBA의 경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1976년 ABBA는 영국, 아일랜드,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각각 3개의 1위 히트곡을 배출했고, 독일과 뉴질랜드에서 각각 4개의 1위곡을, 호주에서는 5개의 1위가 나왔다. 또한 1976년에 적어도 한 개의 싱글이 노르웨이, 스웨덴, 오스트리아, 프랑스 및 스위스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독일에서는 ABBA는 텔레비전에서 다양한 인기 음악 방송에서 정기적으로 프로모션 공연을 했다. 루디 카렐과 함께 진행 중인 밴드와 같은 쇼에서 단골적인 게스트 공연 외에도, 주로 ZDF와 디스코에서 일자 리히터, 라디오 브레멘 음악점 또는 레이너 홀베가 선보인 스타 퍼레이드에 출연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 대접을 받았다.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중 하나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9] 아티스트 중 하나인 ABBA는 총 1,130만 장의 싱글이 팔리며 영국에서는 1974년부터 1981년까지 모든 싱글이 적어도 TOP 10을 기록 했고, 그 중 9개는 1위를 차지했다. 역대 UK 차트에서 가장 많은 1위 곡을 보유한 아티스트 7위이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싱글을 판 밴드 4위에 올랐다. 여기에 발표된 앨범은 1982년까지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지금까지 영국에서는 총 1,700만 장의 ABBA 앨범이 판매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무기한 휴식까지 영국에서의 어마어마한 인기로 그들의 공연과 인터뷰, 총 15개의 콘서트는 매년 화제를 몰고 다녔다. ABBA/역사 항목에도 설명했지만, 1992년 발매한 ABBA의 베스트 앨범 'ABBA Gold'는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3,100만 장 이상이 팔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며 영국에서만 558만장이 팔리며 역대 3번째로 영국에서 많이 팔린 앨범이다. 심지어 이 앨범은 2021년 영국 앨범 차트에서 여전히 차트에 진입하며 역대급 롱런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기록은 영국 음악 사상 최장 기간 신기록이다. 2021년 7월 1주차에는 1,000주 차트인이라는 대기록을 최초로 세웠다. 2021년 6월 4주차 기준 이 앨범은 무려 2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020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24위,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된 앨범 24위#, 2010년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46위를 기록하며 영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스테디셀러 앨범 반열에 올랐다.
영국 이외에도 유럽권, 오세아니아 전역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그룹이다. 베스트 앨범 ABBA GOLD는 이 곳에서도 불티나게 팔린 앨범으로 독일에서는 250만 장 판매, 스위스에서도 50만장 판매, 오스트리아에서는 397주 동안 차트에 올라 역대 2번째로 롱런한 앨범이다. 스웨덴에서는 2016년 10월 이 앨범이 6번째 베스트 차트 앨범으로 등재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이 앨범은 역대 네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다. 호주에서 이 앨범은 역대 네 번째로 많이 팔린 베스트 앨범이다. 아티스트들의 앨범 판매량을 매우 자세하게 분석하기로 유명한 웹 사이트 차트마스터(ChartMasters)에서는 이들의 최고 히트작인 베스트 앨범 'ABBA GOLD'의 판매량을 분석했는데, 차트마스터는 이 앨범이 현재까지 꾸준히 팔리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3,400만장이 팔렸다고 분석했다. 또한 이 앨범은 유럽에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라고 분석했고, 아시아에서는 300만장이나 팔렸다고 말했다. 또한 오세아니아에서는 총 150만장를 넘어섰다고 분석했으며, ABBA의 인기가 비교적 떨어지는 북미권에서도 이 앨범은 1,000만 장 이상 팔렸다고 분석했다.
이들의 전세계적인 성공을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ABBA의 음악을 사용한 미디어 매체의 대성공이다. ABBA의 음악을 사용한 뮤지컬 맘마 미아는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초대박을 기록해 2020년 기준 40억 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여 역사상 가장 흥행한 뮤지컬 3위를 기록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이 뮤지컬은 웨스트엔드 역사상 7번째로 오래 공연된 뮤지컬, 브로드웨이 역사상 9번째로 오래 공연된 뮤지컬을 기록하고 있다. 또 전세계적으로도 롱런을 기록하는 중이다. 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맘마 미아!(2008년 개봉)와 맘마 미아! 2(2018년 개봉) 역시 모두 전세계에서 대박 흥행을 기록했다. 그중에서 영국에서 초대박 흥행을 했는데 1편은 2008년 흥행 1위, 2편은 2018년 흥행 2위를 기록하며 성공했다. 한 아티스트의 음악을 사용해 미디어 매체에서 이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아티스트는 극소수라고 볼 수 있다.
반면, ABBA는 활동 당시 미국에서는 큰 인기를 이루지 못했다. 1972년부터 미국 음반인 플레이보이 레코드사는 이 밴드의 첫 음반을 발매했지만 모두 차트에 도달하지 못했다. 1974년, 스티그 앤더슨은 애틀랜틱 레코드와의 3년 계약을 체결하여 ABBA가 해체될 때까지 모든 음반을 판매했다. ABBA는 1974년, 1975년, 1976년, 1978년에 그 곳에서 프로모션 투어를 했지만, 앨범 중 어느 것도 톱 20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싱글들의 성공도 1위 히트곡과 3위 히트곡으로 크게 제한되어 있었고, 6개가 싱글이 상위 20위에 올랐다. 벤뉘 안데르손은 1976년 인터뷰에서 유럽의 밴드에 대한 미국 음악 시장 진입이 일반적으로 유럽이나 호주 음악 시장보다 더 어렵다는 평가를 했다. 미국에서는 음악 비디오와 TV 출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특히 한 그룹의 라이브 출연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ABBA의 1979년 미국 투어 이후에도 ABBA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의 영화 맘마 미아!의 대히트로 ABBA의 인지도와 인기가 크게 상승한다. 베스트 앨범 'ABBA Gold'는 미국에서 총 580만장이 팔렸고, 닐슨 음악 시대(1991년 시작)의 19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앨범이다.
동양권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일본에서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린 그룹이다. 일본에서 그들의 성공은 특히 1978년 가을의 프로모션 투어에서 비롯되었고, 당시 일본 무도관에서 진행한 모든 공연이 매진되었다. 일본 방문 당시의 텔레비전 쇼와 스페셜은 2009년에 일본에서 ABBA라는 제목으로 DVD로 발매되었다. 일본에서 진행된 ABBA의 콘서트는 1980년에 완전히 매진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현재 일부 획득하기 어려운 ABBA 라이선스 앨범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그룹이다. 70년대 말-80년대 초 당시, 한국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미)다큐멘터리 영화 ABBA (1977)가 개봉한 일은 있다. 외국 음악인의 영화, 특히 전기 영화나 극영화도 아닌 다큐멘터리를 극장 개봉까지 한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세대를 초월한 그룹답게 스트리밍 시대에서도 젊은 층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2021년 영국 스포티파이의 책임자 술리나 옹은 인터뷰에서 "18살에서 24살이 ABBA의 가장 많은 리스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중요한것은 2014년 이후 청취율이 50% 증가했다는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아바의 청취를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세대를 초월한 아바의 엘리트 수준의 작곡에 대한 지속적인 매력을 증명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4. 이름
ABBA는 그들의 커리어 초창기에 성공에 대한 불확실로 확정적인 그룹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그들의 4명의 이름들을 활동명으로 썼다. 그들은 "Bjorrn & Benny, Agnetha & Anni-Frid", "Anni-Frid, Agnetha, Benny, Bjorrn", "Bjorrn + Benny + Agnetha + Frida" 또는 "Bjorrn + Benny + Anna + Frida"라고 불렸다. ABBA의 첫 번째 오펠 차 앞 유리창에는 1973년까지 "BJÖRN BENNY AGNETHA FRIDA"가 쓰여 있었다. 미국의 초기 음반회사에서는 "Bjorrn & Benny, Agnetha & Anni-Frid"의 Agnetha가 부분적으로 빠져서 이름이 불리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앙네타 펠트스코그가 그 당시 CBS-Cupol 레코드 회사로부터 독점 계약을 한 가장 성공적인 소속 스타였기 때문에 펠트스코그의 이름에 대한 라이선스 수수료를 CBS-Cupol에게 ABBA의 소속 회사 폴라 뮤직이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계약관계는 ABBA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 1975년 말까지 계속 적용되었고, 따라서 나중에 앙네타 펠트스코그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CBS-Cupol에 높은 대금 지급을 해야 했다. 또 다른 여성 멤버 안니프리드 륑스타의 EMI Music 음반 계약은 1972년 만료되었다. 1970년대 초, 네 멤버들은 스웨덴 민속 공원에서 진행된 몇몇 음악 페스티벌에서 "Festfolk" 또는 "Festfolket"라는 이름으로 여러 번 공개적으로 공연했고, 스웨덴 클럽과 술집에서 "Engaged Couples"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다. 멕시코에서는 1972년과 1973년에 그들의 레코드 회사는 단순한 그룹 이름인 'Los Suecos'로 처음으로 이름지었다. 이후 그들의 조국인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노래가 성공한 후에야 적절한 밴드 이름을 찾아야 했다. 특히 이 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은 언론에게 항상 "Bjorrn & Benny, Agnetha & Frida"라는 이상한 이름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에 점점 더 화가 났다.
1973년 3월 한 스웨덴 잡지에서는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진 이 그룹에 대한 확정된 명칭을 제출하라는 요청을 발표했다. 이때 등장한 그룹명이 바로 "Friends and Neighbors", "Alibaba", "BABA"라는 이름의 제안이 들어온다. 1973년 여름, 마침내 매니저 스티그 안데르손의 제안으로 그 그룹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스웨덴 예비 결정전에서 이 들의 이름 앞자리를 딴 "ABBA"라는 이름을 정했다. 이 간단하고 매우 두드러지고 간결한 단어 "ABBA"는 앙네타(Agnetha), 비요른(Björn), 벤뉘(Benny) , 애니(Anni) → ABBA의 4명의 밴드 멤버들의 초기 문자에서 유래한 약어이다. 때때로 밴드 이름 구성도 역순(애니, 벤뉘, 비요른, 앙네타)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벤뉘 안데르손과 비요를 울바에우스 콤비는 ABBA라는 이름이 스웨덴에서 Abba Seafood라는 크고 잘 알려진 식품 회사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곤혹스럽다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벤뉘 안데르손은 "ABBA"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이 회사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ABBA"라는 용어는, "아버지의"를 뜻하는 성경 용어이기도 했다. 이 단어의 의미는 1977년 영화 ABBA에서 한 노인의 인터뷰 장면에서 언급된다. 이 밴드의 이름은 국제적으로도 매우 빠르게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거의 모든 언어에서 쉽고 동일한 방식으로 발음되고, 항상 알파벳순으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4. 로고
밴드 이름이 ABBA로 결정된 후, 처음에는 커버, 포스터, 기타 프로모션 자료에만 타이포그래피로 그려졌다. 1976년 2월 ABBA는 독일 음악 방송 디스코에 출연하기 전에 사진작가인 볼프강 힐레만과 인근 스튜디오에서 독일 청소년 잡지 브라보(Bravo)의 일부 사진 작업을 의뢰받았다. 여기에서 네 명의 밴드 멤버가 각각 큰 은색 이니셜 문자를 들고 촬영하는 촬영 현장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 사진들에서 안데르손은 두 번째 자리에 서서 실수로 "B"를 거꾸로 들고 머리 위로 올렸지만, 사진 촬영이 끝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사진 작가는 이 밴드 멤버들에게 그 오류를 알려준 후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잠시 대화를 나눴고, 오히여 이 사진이 마음에 들어 이 로고를 소유하기로 결정하고 힐레만에게 "대형 마케팅 아이디어"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뉴스 고딕볼드의 그래픽 디자이너 룬 쇠데르크비스트는 반사형 "B"로 ABBA 철자를 개발하여 두 "B"가 두 "A"에 조화롭게 접근한다고 설명했다.
ABBA 로고는 1976년 8월 13일 공식적으로 발효됐고 등록됐다. 싱글 'Dancing Queen' 이후 지금까지 모든 공식 ABBA 레코드, 출판물 및 팬 기사에 이 로고가 사용되고 있다. CD 싱글 'Dancing Queen'과 1992년 베스트 앨범 'ABBA Gold'가 출시된 이래, ABBA 로고는 'Helvetica Roman' 글꼴로 개발된 버전도 사용되었고, 문자가 좀 더 작았지만, 굵기가 좀 더 넓었다. 그러나, Gold 앨범의 이후 앨범 발매에서는 이전 오리지널 로고가 다시 사용되었다. 반사형 "B"로 표시된 ABBA의 로고는 AC/DC의 로고와 롤링 스톤스의 키스 로고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음악 그룹 상표 중 하나가 됐다.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로고가 완성된 직후 새로운 ABBA 글꼴을 상표로 보호하도록 하였으며, 따라서 종종 추가 등록 기호인 ®를 부착하기도 한다. ABBA 로고가 상표로 등록된 후, 이 로고의 저작권은 ABBA 소유의 마케팅 회사가 소유한 권리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일부 오리지널 사운드 미디어, 다양한 라이선스 및 비공식 사운드 미디어에서는 ABBA 로고가 아닌 오리지널 로고를 그래픽으로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5.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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