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More Lonely Nights / Paul McCartney (1984)
I can wait another day until I call you
You've only got my heart on a string
And everything aflutter
But another lonely night might take forever
We've only got each other to blame
It's all the same to me love
'Cause I know what I feel to be right
No more lonely nights
No more lonely nights
You my guiding light
Day or night I'm always there
May I never miss the thrill of being near you
And if it takes a couple of years
To turn your tears to laughter
I will do what I feel to be right
No more lonely nights (never be another)
No more lonely nights
You're my guiding light
Day or night I'm always there
And I won't go away until you tell me so
No, I'll never go away
Yes, I know what I feel to be right
No more lonely nights (never be another)
No more lonely nights
You my guiding light
Day or night I'm always there
And I won't go away until you tell me so
No, I'll never go away
And I won't go away until you tell me so
No, I'll never go away
No more lonely nights
당신에게 전화하기 전에 하루는 더 기다릴 수 있어요
당신은 내 마음을 당신 마음대로 주물렀고
또 안절부절 못하게 했어요
하지만 또 다른 외로운 밤은 영원처럼 느껴질 지도 몰라요
우린 서로 상대 탓만 해왔지만
내겐 다 마찬가지예요, 사랑
내 느낌이 옳다는 걸 아니까요
외로운 밤은 이제 그만
외로운 밤은 이제 그만
당신은 나를 이끌어주는 빛
밤이고 낮이고 난 늘 거기 있어요
당신 가까이 있을 때의 그 두근거림, 어찌 그립지 않겠어요?
당신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는데
2-3년이 걸린다 해도
난 내가 옳다고 느끼는 대로 하겠어요
외로운 밤은 이제 그만
외로운 밤은 이제 그만
당신은 나를 이끌어주는 빛
밤이고 낮이고 난 늘 거기 있어요
당신이 떠나라고 하기 전엔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난 내 느낌이 옳다는 걸 알아요
외로운 밤은 이제 그만
외로운 밤은 이제 그만
당신은 나를 이끌어주는 빛
밤이고 낮이고 난 늘 거기 있어요
당신이 떠나라고 하기 전엔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떠나라고 하기 전엔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외로운 밤은 더 이상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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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밤은 더 이상 싫다는 No More Lonely Nights.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드는 밤에 들음 좋은 노래같다. 1984년 9월에 먼저 싱글로 발표된 뒤, 그해 말에 발매된 앨범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에 수록됐던 곡으로,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6위, 영국 싱글 차트 2위에 올랐었다. 참고로 폴 매카트니는 1997년 3월 11일,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그의 공식적인 호칭은 Sir James Paul McCatrney 즉, 제임스 폴 매카트니 경이다. 전세계에 영국을 빛낸 비틀즈 멤버 가운데 가장 영국적인 영국 가수로 그가 선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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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James Paul McCartney
- 출생 1942년 6월 18일, 영국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 직업 싱어송라이터,음악 프로듀서,영화 프로듀서,사업가
- 장르 록, 팝, 고전, 전자
- 악기 보컬,베이스,피아노,밴조,트럼펫,기타
- 활동 1957년 ~ 현재
■제임스 폴 매카트니 경(Sir[2] James Paul McCartney, CH[3], MBE[4], 1942년 6월 18일 ~ )은 영국의 가수, 작사작곡가, 음악가, 음반·영화 프로듀서이다. 비틀즈의 공동 리드보컬리스트, 공동작곡가, 베이시스트로서 전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베이스 연주에 있어서의 선율적 어프로치(melodic approach), 다재다능함과 폭넓은 테너 보컬, 음악적 절충주의, 초기 로큰롤 팝에서 클래식, 일렉트로니카에까지 이르는 장르 탐구는 그 이름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존 레논과 가졌던 작곡 파트너십은 지금껏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서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리버풀 출신. 청소년기 피아노, 기타, 작곡을 독학하였고, 재즈 연주자인 아버지와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 등 로큰롤 가수들에 영향을 받았다. 1957년 밴드 쿼리멘의 멤버가 됨으로써 커리어를 시작하였으며 1960년 이 밴드는 비틀즈로 발전한다. 별칭은 '귀여운 비틀(the cute Beatle)'. 비틀즈 활동 후기 런던의 아방가르드를 접하고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967년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부터는 비틀즈의 사실상의 리더가 되어 그 음악과 영화 프로젝트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매카트니가 비틀즈 시기 작곡한 〈And I Love Her〉, 〈Yesterday〉, 〈Eleanor Rigby〉, 〈Blackbird〉 따위는 가장 많이 커버된 노래의 명단에도 실린다.
비틀즈 해산 이후 1970년 앨범 《McCartney》의 발표와 함께 솔로 아티스트로 데뷔하였으며 부인 린다, 데니 레인과 밴드 윙스를 결성하였다. 매카트니의 리드에 따라 윙스는 70년대 가장 성공한 밴드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한 다스가 넘어가게 톱 10 싱글 및 앨범을 배출하였다. 1980년 솔로 커리어를 재개하여 89년까지 솔로 아티스트로서 투어를 돌았다. 윙스 없이도 영미 1위 히트곡으로 〈Uncle Albert/Admiral Halsey〉(린다 합작), 〈Coming Up〉, 〈Pipes of Peace〉, 〈Ebony and Ivory〉(스티비 원더 합작), 〈Say Say Say〉(마이클 잭슨 합작) 따위를 배출하였다. 음악 방면 외에서는 여러 국제적 자선단체의 홍보에 힘쓰고 있으며 동물권, 물개 사냥, 지뢰, 채식주의, 빈곤, 음악 교육 따위 주제에서 그 활동은 두드러진다.
빌보드 핫 100 정상에 단독, 공동 작곡한 곡을 총 32개 올려놓았으며 2009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2,550만 장의 판매기록을 RIAA에서 인증받았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비틀즈로서 그리고 솔로 아티스트로서 2회 헌액되었으며, 1965년 대영제국훈장을 수훈하였으며 1997년 음악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최하위 훈작사에 임명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그의 부는 8억 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린 시절
매카트니는 1942년 6월 18일 리버풀의 월튼 구역에 자리한 월튼 병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메리 패트리샤(Mary Patricia)는 이곳에서 유자격 간호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임스 "짐" 매카트니(James "Jim" McCartney)는 당시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인지라 자원 소방수로 일하러 가는 바람에 매카트니의 태어나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매카트니에게는 피터 마이클이라고 하는 남동생과 아버지가 재혼하여 얻은 여동생 루스가 있었다. 가톨릭을 믿은 어머니를 따라 폴과 마이클 모두 세례를 받았으나 아버지가 신교도에서 불가지론자로 전향하여 종교의 큰 영향없이 자라났다.
매카트니의 전기작가 피터 아메스 칼린에 따르면 매카트니의 부모는 "노동자계급의 최하층" 출신이었으나, 그 생애 동안 다소의 계층이동을 경험해 보았다 한다. 전전 영국에서 짐은 목화를 파는 회사 A. Hannay and Co.에서 판매원으로 일하였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회사는 문을 닫고 짐은 대신 네피어에서 선반공으로 일하였다. 밤에는 자원하여 소방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가족이 늘자 노슬리에 있는 플랫으로 이사하였고, 1946년 다시금 스피크에 있는 공영주택으로 옮겼다. 전후 짐은 목화 판매원으로 복직하였으나 임금은 줄은 상태였다. 메리가 방문 조산사로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을 정도였다.
1947년에서 1949년까지 스피크의 스톡턴 우드 로드 초등학교에 다녔으나 학교의 정원초과로 인하여 벨 베일의 조셉 윌리엄스 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1953년 90명 가운데 3명만 통과한 11플러스 시험에 합격하여 그래머 스쿨인 리버풀 인스티튜트에 다니게 되었다. 1954년 스피크의 교외집에서 출발하는 버스에서 학우 조지 해리슨을 만났다.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매카트니는 후일 말하기를 "저는 그를 깔보듯 말하고는 했는데 그가 저보다 한 살 어렸기 때문이에요."라 했다.
매카트니의 어머니 메리는 조산사로서 일가에서 중추적인 수입원이었다. 메리의 수입 덕에 앨러튼의 포슬린 로드 20번지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가족은 1964년까지 살았다. 메리는 환자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였는데, 매카트니는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새벽 3시의 거리 ... 눈이 깊이 쌓인" 날 출근하였노라 말하였다. 1956년 10월 31일 매카트니가 14살이 된 해에 어머니는 유방암 수술의 합병증인 색전증으로 사망하였다. 매카트니의 아픔은 훗날 17살 때 어머니 줄리아를 잃은 존 레논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주었다.
■음악성
매카트니는 대체로 홀로 터득한 음악인으로서 그 어프로치를 두고 음악학연구자 이언 맥도널드는 "선천적으로 음악의 형식적 면에 이끌리지만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 거의 완전히 직감으로서 기술적으로 '완성된(finished)'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의 화성적 판단은 대개 완벽한 음높이 및 섬세한 두 귀에 기반하고 있다. 그야말로 타고난 멜로디스트—그 하모니와 별개로서 존재 가능한 음악의 창조자이다."라고 말한다. 매카트니는 자기의 어프로치를 두고 "훈련없이 그린 원시사회의 동굴 아티스트"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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