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 드레스 / 한상일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우리를 울였던 지난 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가 미워한 지난 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
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우리를 울렸던 비바람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가 미워한 눈보라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
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가요계의 신사’, 아리따운 신부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다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우리가 울었던 지난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우리가 미워한 지난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웨딩드레스(이희우 작사, 정풍송 작곡, 한상일 노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 한상일씨가 1970년 2월에 발표한 노래 ‘웨딩드레스’다. 이 노래는 정인엽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먼데서 온 여자(이희우 극본, 정인엽 감독, 신성일 윤정희 김정훈 김창숙 주연)’의 주제가다. 당시 발표되자마자 ‘하와이안 웨딩 송’과 더불어 결혼축가의 대명사로 자리했다.
흔히들 ‘노래엔 임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노래는 '신사의 멋'이 물씬 풍기는 한상일씨의 분위기에 제 격이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 ‘웨딩드레스’는 처음 작곡가 길옥윤씨와 정풍송씨에 의해 각각 만들어진 노래다. 말하자면 같은 노랫말에 멜로디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노래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 공교롭게도 두 작곡가의 각기 다른 노래는 모두 한상일씨에 의해 취입되었다.
“1주일 정도의 차이로 같은 가사의 노래를 각각 다른 멜로디로 연습해야 했어요. 그리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음반이 나왔지요. 때문에 방송국 측에서는 신청엽서를 받으면 어느 곡을 틀어야 할지 몰라 애먹었고 저 역시 무대에서 ‘웨딩드레스’를 요청받으면 무대에 따라 두 곡을 번갈아 부르기도 했지요.” 한상일씨의 회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풍송 곡의 ‘웨딩드레스’는 발표 당시 영화 제목을 따서 ‘먼데서 온 여자‘라는 별도의 부제를 달고 출시되었다.
가수 한상일씨는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은 곡을 발표하지 않았다. 가수로서의 활동 기간도 길지 않다. 1965년 손석우 작곡의 ‘추억의 아카시아’, ‘나의 사랑 기타’를 발표하며 데뷔한 그는 70년대 말 가요계를 떠났다. 자신의 전공을 찾아 건설 분야의 직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30 여 년 뒤인 2005년 '작곡가 손석우 노래 55주년 헌정음반'을 통해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 ‘그 이름’ 등을 발표하며 돌아왔다. 오랜 동안 가요계를 떠나있었음에도 가창력은 여전했다.
유년시절,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우등생이자 재주꾼으로 통해
1941년 1월 18일, 이북 땅 개성에서 부친 한효경(韓孝慶)과 모친 진은주(陣銀珠) 사이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 개성 만월초등학교 4학년 때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으로 피난 내려온다.
인천 서림초등학교, 인천중힉교를 거쳐 서울 경동고를 졸업했다. 중2 때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혼자가 되어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인천의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신문배달 등으로 고학을 해야 했다. 이후 서울 경동고등학교 진학한 그의 꿈은 의사였지만 진로를 바꿔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에 진학한다.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자 노래 잘하는 재주꾼으로 통했던 그는 특히 대학시절, 친구들과 4중창단을 결성해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특히 마리오 란자, 앤디 윌리암스, 후랭크 시나트라 등에 심취했다.
1965년 대학 졸업 후 은사가 설립한 ‘김희춘 설계사무소’에 입사, 설계기사로 일을 시작하지만 결국 노래를 부르기 위해 미8군 장교클럽인 ‘유썸클럽(Yusumclub)’에서 전속가수, 즉 하우스 싱어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주위의 도움으로 누구보다 먼저 ‘팝송악보’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스탠더드 팝을 무려 3백여 곡 정도나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레파토리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작곡가 손석우 선생을 찾아가 신곡들을 받아 취입한다. 이중 ‘가거라 저 멀리(1966년)’가 히트하면서 손석우 선생의 권유로 KBS-TV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해 칸초네 ‘Carissimo Pinocchio(피노키오의 편지)’를 불러 1기생으로 발탁된다. 1966년도의 일이다.
본명은 한제상(韓濟祥). 그러나 손석우 선생은 그에게 한상일(韓常一)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글자 그대로 '늘 어디서든 일등이 되어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면테스트까지 거친 TV 전속가수였기 때문에 무대에서 노래는 물론 율동까지 소화해내야 했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 골수염으로 인해 오른쪽 발목을 잘라낼 위기까지 넘겼던 터라 다리가 불편해 무대에서의 율동을 소화해내기가 어려웠어요.”
때문에 방송국 측 입장에서는 한편 난감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생각된다는 그는 결국 무대 대신 라디오 진행자로 '밤으로의 초대'나 '장미의 화원' 같은 음악프로그램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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