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제비 - 조영남

청가헌 (聽可軒) 2022. 3. 17. 06:46

제비 / 조영남

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

푸르른 저 별빛도 외로워라

사랑했기에 멀리 떠난 님을

언제나 모습 꿈속에 있네

먹구름 울고 찬서리 친다해도

바람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고운 눈망울 깊이 간직한채

당신의 마음 품으렵니다

아아 그리워라

잊지못할 내님이여

나 지금 어디 방황하고 있나

어둠뚫고 흘러내린 눈물도

기다림속에 님을 그리네

바람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당신의 모습 품으렵니다

 

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

푸르른 저 별빛도 외로워라

사랑했기에 멀리 떠난 님을

언제나 모습 꿈속에 있네

먹구름 울고 찬서리 친다해도

바람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고운 눈망울 깊이 간직한채

당신의 사랑 품으렵니다

아아 그리워라

잊지못할 내님이여

나 지금 어디 방황하고 있나

어둠뚫고 흘러내린 눈물도

기다림속에 잠들어 있네(반복)

바람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기다림속에 님을 그리네

 

출생      1945513일 

           황해도 평산군

배우자  윤여정(1972년 결혼; 1984년 이혼)

          백은실 (이혼)

가족    조승초 (아버지), 김정신 (어머니)

          조영수 (동생)

         조얼 (장남), 조늘 (차남)

종교   개신교

조영남(趙英男[1], 1945513~ )은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 학력

삽교초등학교 (졸업)

삽교중학교 (졸업)

강문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성악과 (중퇴)

서울대학교 성악과 (중퇴)

트리니티대학교 신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1968년 학비를 벌기 위해 미군 악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곡으로는 화개장터 모란동백등이 있다.

■ 초기 활동

황해도 평산군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1951년 한국 전쟁때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이 중공군을 피해 1.4 후퇴를 할 때 온 가족이 LST미국 군함에 몸을 실어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면으로 피란했고 어린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배우 백일섭과는 고등학교 동문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조영남은 처음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개인사정으로 자퇴하고 196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하였다. 서울대 재학 중 세시봉, 오빈스 케빈 등 캠퍼스 가수로 명성을 얻었다.

 

가수 활동

대학에 다니던 1968년에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삼아 미8군 부대의 주한 미 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1969년에 영국 가수 톰 존스가 발표해 영국 싱글차트 2위까지 오른 팝 가요딜라일라 (Delilah)를 한국어로 번안한 곡으로 김인배 편곡집에 수록되어 1969년 대한민국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데뷔 이후 대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수로 활동하는 데에 어려웠기 때문에 잠깐 '고철(高哲)'이라는 예명으로 작사가 활동을 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자퇴하고 세시봉이라는 음악 다방에서 윤형주, 이장희, 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등 여러 가수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조영남은 세시봉 활동 때 김시스터즈 내한 공연에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는데,신고산 타령'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로 개사하여 불렀다가 미움을 사서 군대에 입대하였다. 군 복무 중에 당시 대통령 박정희 앞에서 이애리수의황성옛터를 부를 것을 요청받았지만 분위기를 띄울 목적으로각설이 타령을 불러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변호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는 그림그리는 취미를 길러 화가 수준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현재 그림 대작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 귀국 이후

198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고 가수 김도향과 함께 음악작업을 하면서 그와 함께 음반을 발매하며 활동을 해왔다. 1987년에는 주시경 선생을 존경한다는 신념에 따라 사극 MBC 드라마 한힌샘(MBC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였다. 한편 조영남은 결혼 후 윤여정 사이에 2남을 두었으나 성격 차이와 본인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점으로 결국 1987년에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공백기를 가졌다. 공백 기간 동안 조영남과 같이 지내며 의지가 되어주었던 김한길과 함께 지냈을 무렵, 어느 날 신문에 화개장터 기사를 보고 소설가로 활동하던 김한길이 가사를 쓰게 되었다. 그 가사에 조영남이 직접 작곡한 멜로디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곡명을 화개장터로 하고 앨범을 발표하였다. 데뷔 이후 번안곡이나 성가를 주로 불러 국민들에게 널리 불리는 히트곡이 없었는데 화개장터가 히트하면서 조영남을 TOP 가수 반열에 오르게 하여 80년대 최고의 가요로 자리잡았다. 또한 사랑노래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도 김한길이 작사하였고 이 곡도 히트하였다. 1988년에 두 곡이나 히트하게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정상에 오른 조영남은 여러 공연과 무대에 출연하여 인기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 다양한 활동

1989년에 자니 윤이 진행하는 KBS 2TV 자니윤 쇼에 보조 진행자로 활동한 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수로서의 조영남보다는 방송인으로서의 조영남이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1993년에 이경실과 함께 1대 진행자를 맡은 KBS 2TV 체험 삶의 현장이 주목을 받았다. 윤여정과 이혼 후 1995년에 백은실과 결혼하고 딸 조은지를 입양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현재는 딸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일어난 와우 아파트 붕괴사건이 일어났을때 함경도 신민요 신고산 타령을 가사만 바꾸어 "와우 아파트가 우루루루루루 무너지는 소리에..."로 시작하는 노래로 불러 그 첫구절이 문제가 되어 신문과 뉴수에 나기도 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조영남은 가수가 아닌 화가로도 활동하면서 화투그림을 그려 자신만의 화투화가의 영역을 개척했다고 알려졌으나, 200편 이상을 대작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10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2005년에 저술한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에서 각종 친일 발언으로 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1013일 새벽 0시 경에 경미한 뇌졸중 초기 증상으로 서울 강북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완쾌되는 등 건강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였었으나 지금은 라디오 시대DJ로 다시 복귀, 이후 12월에는 데뷔 41년 만에 모두 신곡으로 이루어진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에 거주하며, 2010년 조영남의 청담동 집이 연예인들 중에서 가장 비싼 집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4]

 

201112월 조영남의 미술작품이 현대자동차 갤러리를 장식했다. 20128월에 조영남이 작곡하고 김연식 태백시장이 작사한 태백의 노래를 선보였다.

■ 사건

조영남은 각종 친일 언행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켰었다. 우선 200519일 방송된 MBC의 다큐멘터리 '거울속의 한일', 11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등 언론을 통해 친일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5][6]이후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의 출간과 독도와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하여 일본 산케이 신문과 진행한 인터뷰 중 '일본이 한 수 위이다' 등의 발언을 하여 더 큰 논란에 휩싸였다.[7] 이러한 친일 발언으로 인해 결국 자신이 진행을 맡고 있던 KBS 1TV의 프로그램 체험 삶의 현장에서 하차하게 되었다.[8]

2009110, 자신이 진행하는 MBC 표준FM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에 대해 "점쟁이같은 모르는 남의 말을 추종하는지 모르겠다. 다들 믿다가 잡아보니 별 이상한 사람이고 다 속았다."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불러왔다.[9] 결국 조영남이 112일 방송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를 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10]

2011921, KBS 2TV빅브라더스방송 중 게스트로 출연한 소녀시대의 태연에게 기습적으로 포옹을 시도하였다는 논란이 발생하였다.[11]

2015829불후의 명곡 2 -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그룹 이름 마마무를 엄마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여 네티즌과 마마무 팬클럽의 비난이 KBS 홈페이지와 각종 사이트에 빗발친 적이 있다.

조영남은 자신이 입양한 여아에 대해 이제 막 은지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했다. 엄청 사정해야 한 번 보여줄까 말깐데 정말 예쁘다. 환상적이다.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다운 걸 브래지어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녀야 하다니라고 말해 큰 논란을 샀다.

조영남은 1973년 첫 개인전 이후 40회 남짓 전시회를 열며 스스로 화수(화가 겸 가수)’라 표현해 온 조씨는 오래 전부터 화투 그림에 천착해 왔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적 없는 조씨는 독창성 있다는 호평과 산만 조악하다는 혹평을 함께 받아 왔다. ‘그림 대작(代作)’ 사건은 2009년 조씨가 알고 지내던 뉴욕 출신 무명 직업화가 송씨에게 자신의 콜라주 작품을 회화로 다시 그려보라고 제안한 게 발단이다. 완성품이 마음에 든 조씨는 그때부터 작품을 직접 만드는 대신 송씨로부터 200점 이상 화투 그림을 받아 덧칠 등만 한 뒤 자신 이름을 걸고 전시했다. 결국 1심 사기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으며[12] 그 이후 2018318일 방영된 KBS 2TV 12일에서 잡지(2016년 우먼센스 6월호)에 실린 본인의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201671일 자로 KBS·EBS·MBC 출연정지 연예인 명단에 올랐고, 나중에는 JTBC·MBN·TV조선 출연정지 연예인 명단에 올라야 했으나 현재 KBS EBS MBC 출연정지 연예인 명단에서 해제됐다. 2018817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받았다.

녹화 방송 촬영 현장에서 사유리에게 몇명과 성관계 해봤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