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한번쯤 - 송창식

청가헌 (聽可軒) 2022. 3. 18. 05:17

한번쯤 / 송창식

한번쯤 말을 걸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여오겠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가오는데 왜 이렇게 망설일까 나는 기다리는데

뒤돌아보고 싶지만 손짓도 하고 싶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봐야지 한번쯤 돌아서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겁먹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겠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 왔을텐데 왜 이렇게 앞만보며

나의 애를 태우나 말 한번 붙여봤으면 손 한번 잡아

봤으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천천히 걸었으면

 

출생      1947222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본관     진천 송씨

신체     175cm

배우자  한성숙

자녀     아들 송결 딸 송빛터 송무늬

학력     인천신흥초등학교 (졸업)

           인천중학교 (졸업)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 생애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11녀 중 장남으로 경기도 인천부 신흥동(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전사하고, 이후 어머니도 행방불명된 뒤 조부모 슬하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인천신흥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수석입학 하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지, 인천중학교 재학 때 "남들도 날 모차르트라고 불렀고, 나도 스스로 모차르트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3 때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도 잘해 늘 엘리트 그룹에 속했지만 그는 음악에 인생목표를 정하고 제물포고를 가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4]을 거역한 채,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하게 된다.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겨우 이어가긴 했으나,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결국 유급 통지서를 받아 그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기로 하고, 결국 1년을 다닌 후 중퇴하였다. 서류상으로는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전몰 상이군경 자녀는 퇴학시킬 수 없는 법령이 시행 중에 있어 서울예고에서 서류상으로만 특별히 졸업 처리해 준 것이라고 한다. 서울예고 동창으로는 금난새가 있다. 금난새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음악에 정말 천재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바로 송창식.

 

EBS `싱어즈-시대와 함께 울고 웃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우리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내가 어렸을 때 나를 잃어버리면 어디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면 내가 있었다. 라디오 방이라든지 약 장사들이 들고 다니는 음악책을 펼쳐 보니까 콩나물 대가리들이 있었는데 음정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가사로 부르는 게 너무 지루하니까 그걸로 부르다 음계를 알았다"라고 말했다.

 

8~9살 때 곡을 쓸 줄 알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모차르트`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모차르트라고 했다. 나는 모차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그래서 내가 모차르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모차르트가 누군지 알고 나니까 엄청난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예술고교 성악과에 진학했지만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포기한 게 아니라 포기시킨 거다. 왜냐하면 낙제됐으니까. 나는 선생님이 없어 실기시험을 못 봐 0점을 받았다. 그때는 죽을 만큼 괴로웠는데" 라고 말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세시봉 출신으로 1970-80년대 포크송계를 주름잡았던 가수로 윤형주와 함께 듀엣 트윈폴리오로 데뷔했다가 윤형주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1970년에 솔로로 전향했다.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수완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에[5]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서 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 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에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빈털터리인 것은 아니며,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작권료로만 매해 7,500만원의 고정 수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쓸 만큼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라 그 시절 돈을 꿔가고 보증을 서준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윤형주와는 트윈 폴리오를 하기 전 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지금까지도 그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 세시봉 멤버들이 나와서 토크할 때 송창식의 가난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노래 불러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이후 방황하다가 어느날 AFKN 흑인 아마추어들이 블루스 경연대회를 보고 크게 충격받는다. 아마추어라고 비웃다가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고 20년간 음악을 해왔는데 아마추어만도 못한실력이였다고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 이후 그는 피나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더욱 갈고 닦아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조영남을 만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세시봉과 오빈스캐빈에서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만났고 특히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하면서 재능이 만개했다.

■ 이야깃거리

취미가 바둑과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바둑 실력은 아마 3단으로 상당한 실력이다. 클래식을 전공해서 그런지, 송창식의 기타 반주 곡들을 대부분 피아노로 작곡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60년대 후반의 '트윈 폴리오' 시절까지만 해도 번안곡을 부르는 가수였던 송창식이 본격적으로 작곡을 결심한 계기는 김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70, 솔로로 독립하여 창작곡 '창밖에 비오고요'를 발표했지만, 본인의 표현으로는 욕먹지 않을 정도의 곡이어서 앨범에 한번 실은 거였다고 한다. 김민기가 1971, 아침 이슬을 비롯하여 전체를 자신의 자작곡으로 채운 자신의 1집 앨범 '아하 누가 그렇게'를 냈을 때, 송창식은 그 앨범을 듣고 큰 충격을 받고 본격적으로 싱어송라이터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때부터 송창식과 김민기는 서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는데, 이후 송창식은 김민기와 공동으로 만든 두번째 앨범과 초기의 최대 걸작인 '나그네' 등의 명반을 연이어 내놓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민기가 78년 살벌한 유신 독재 시대 때 공장의 불빛이란 노래극의 음반을 녹음할 때, 선뜻 자신의 녹음실을 빌려 줬던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고 한다. 만약에 누군가가 밀고를 했더라면 송창식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고문 당하고, 활동 금지 처리된 뒤 그날로 가수 생명이 끝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용기라 평가하지 아니할 수 없다.

조영남이 말하길 김민기와 함께 송창식은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결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조영남이 말하길 본인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날이면 가장 성대하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람이 송창식 부부였다고 한다. 가수로서 잘 나갔던 송창식이 어느날에 단칸방으로 된 좁은 작업실에서 겨우 지내는 모습으로 본인을 머쓱하게 맞이했다고... 와이프가 사업으로 송창식이 그 동안 번 돈을 다 날렸다고 하자, "다시 벌면 되지 뭐.." 이런 식으로 말했단다. 그의 돈에 대한 평소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 나와서 변치않는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입을 열때마다 유재석이 진심으로 감격하는것이 보일 정도. 프로그램에서 CM송을 딱 하나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빙그레 투게더 (엄마, 아빠도 함께~) 놀러와의 세시봉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후 PD가 말하길 세트장의 음향 장비가 완벽하게 구비되지 않아서 노래를 전문적으로 하기엔 다소 열악한 환경이었는데, 송창식이 마이크만 잡으면 고래가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트윈 폴리오의 여러 번안곡중 하얀 손수건의 작사를 했는데 윤형주가 놀러와 세시봉 콘서트 특집에서 가사를 왕창 깎아내리고[12] "송창식 작사입니다." 한마디로 마무리 한다. 송창식의 이마에 나타나는 사거리 마크는 덤.

공연에 출연할 때 항상 한복을 입는다. 1975년 홍콩에서 열린 국제아마추어가요대회에 양복을 입고 참가했다가 어울리지 않아 이후로는 거의 한복을 입고 출연한다.

가수 김도향과 함께 단전 호흡 수련을 오랫동안 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인생관, 가치관이 특이하다. 매일같이 특이한 체조와 함께 점심마다 같은 음식을 하나 정해서 몇 년 째 먹는다고 한다. 현재는 스파게티만 3~4년 째 점심으로 매일 같은 가게에서 먹는다고 한다. 스파게티 주인이 송창식씨가 매일 찾아와서 같은 스파게티를 먹으러 온다고 방송에까지 나왔었다.

자신의 시를 가수들에게 절대 허용하지 않기로 유명한 서정주 시인이 유일하게 송창식에게 '푸르른 날'은 곡을 붙이기 편할 거야라고 하며 노래로 만들기를 허락했다고 한다.

의외의 사실인데, 송창식은 허영만의 만화 타짜/1부에서 등장하는 짝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허영만은 과거 고독한 기타맨에서 송창식을 모티브로 한 송창석이라는 캐릭터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 디자인이 변화해서 지금의 짝귀로 진화했다.

컴퓨터를 6대나 사용하는 고수, 아들 송결[13]은 엔씨소프트 게임 기획자. #

대머리라는 것이 밝혀졌다.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위 사진은 가발을 착용한 것이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열린음악회에 이미 상당히 탈모된 상태로 나왔다. 이때는 가발을 쓰지 않았다.

2012128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2에서 전설의 가수로 송창식이 초대되었다. 그가 나온다는 소식에 참여자들이 두배는 많이 모여 부득이하게 2주 연속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배우자는 서울예술고등학교 동기인 한성숙 씨이다. 송창식은 음악과이고 한성숙은 미술과여서 졸업 이후에는 인연이 없었는데, 19761231일에 열린 동창모임에서 재회하자 금세 사랑 고백을 하고 보름 뒤에 부산 처가로 찾아가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한성숙 씨는 우석대학교[14]로 진학하여 대학 시절에 메이퀸을 하기도 했고, 스튜어디스 생활을 거쳐 외국계 무역회사 한국 지사장 등 다양한 사업가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송창식의 명곡 중 하나인 '사랑이야'의 작사가이기도 한데, 이는 1977년에 송창식이 향군법 위반으로 감옥에 있을 때 면회 온 한성숙 씨에게 곡의 마무리를 맡기면서 이뤄졌다.

슬하에 21녀를 두고 있는데, 첫째 아들 송결 외에 첫째 딸(송무늬), 둘째 아들(송빛터)은 모두 입양한 자식들이라고 한다. 언론을 통해 공개한 가족사에 의하면 입양한 자녀 모두 처형과 관계가 있다. 송창식의 아내(한성숙)와 처형(한성순)은 쌍둥이 자매로 둘 다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에 재학하여, 이들 셋은 모두 동기동창 관계였다. 송창식도 약혼 전에는 처형과 더 친분이 더 있었다고 한다. 처형 한성순은 일찍 미국으로 유학하여 회화와 미술관 행정을 전공했으며, 미국에서 '소니아 한'이라는 이름으로 로스엔젤레스를 중심으로 행위예술가로 활동했다. 첫째 딸의 경우는 난임인 처형이 아기를 갖고 싶어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을 추진했다가 관련 법규가 바뀌면서 무산되게 되었는데, 이 아이를 거둬 기른 것이라고 한다. 둘째 아들의 경우는 이후 처형이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 및 출산에 성공했으나, 당시 처형이 직접 양육할 사정이 못 되어 이 처조카를 입양한 것이라고 한다.[15]

미사리에 위치한 쏭아 라이브 카페에서 매주 꾸준히 공연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카페의 상호 자체가 송창식의 젊었을 적 별명에서 따온 것이고, 카페 건물도 송창식 본인이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방송에서 사용하는 기타는 Ovation Legend(오베이션 레전드) C2017-AX_5라는 기타다. 검정색의 광택나는 바디가 특징.

박용하의 아버지가 자신의 매니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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