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나 어떡해 – 산울림

청가헌 (聽可軒) 2022. 7. 27. 09:37

나 어떡해 / 산울림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나 어떡해

나를 두고 떠나가면

그건 안돼

정말 안돼 가지 말아

누구 몰래 다짐했던

비밀이 있었나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못 믿겠어 떠난다는 그 말을

안 듣겠어 안녕이란 그 말을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못 믿겠어 떠난다는 그 말을

안 듣겠어 안녕이란 그 말을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 결성  1973년
  • 데뷔  1977년 9월 12일
  • 활동  1977년 ~ 2008년 2월
  • 장르  록,포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하드 록, 사이키델릭 록
  • 멤버  보컬,기타 김창완

                베이스 김창훈

                드럼 김창익

개요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 형제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록밴드이다. 1977 <산울림 새노래 모음>로 데뷔했으며, 대한민국 대중 음악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밴드로 평가받는다. 서울대학교 2(김창완, 김창훈)에 고려대학교 1(김창익)의 가족밴드다.

 

산울림 삼형제는 어릴 적에 주말마다 방에 계란판을 붙여서 방음실로 만들고 싸구려 기타로 자기들이 만든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개최된다고 하여 삼형제가 무이(無異, 평소와 다름없음)라는 밴드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한다. 당시 김창훈은 샌드페블즈 5기 멤버(75학번)로 있었는데, 샌드페블즈 6(76학번)에게 바톤 타치하고 무이로 들어오면서 자작곡 "나 어떡해(이 곡은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되어 다시 실린다)" 를 샌드페블즈에게 주었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산울림 1집 수록곡)"  1,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 2위를 기록했는데 김창완이 1975년 졸업생이라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규정에 걸려서 무이는 결국 탈락하고 제1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샌드페블즈가 탔다. 이후에 "나 어떡해"가 김창훈이 쓴 곡임을 알고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삼형제는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이제 사회 생활을 할 나이가 되었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을 마지막으로 기념하는 의미에서 음반 제안에 응했고 이렇게 해서 산울림 1집이 나왔다. 이때 레코드 판이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대박이었다고 한다. 이후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에 뽑혔다. 참고로 6위가 산울림 2집이다.

 

초기(1~3)에는 펑크 록 느낌의 디스토션이 강한 공격적인 사운드를 많이 보여줬는데 이 스타일은 영미 록의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성향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어떠한 선대 록 음악의 성향도 받아들이지 않은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작법이었다. 실제로 삼형제는 데뷔 전 대학 그룹 사운드가 흔히 하던 카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부터 작곡에 몰두 데뷔 시점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창작곡이 있었다. 산울림의 초반이 그야말로 전설로 남게 된 것은 미숙한 실력과 부족한 장비를 가지고도 도달하였던 파격에 가까운 독창성 때문이다. 오로지 외국 음악 카피만 하면서 자체 창작은 도외시하고 연주력에만 목 매달던 일부 음악인들에게 산울림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직접적으로는 3집까지는 한국식 개러지 록의 탄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의 초기작은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시작" 이라고도 평가된다. 어떤 음악에도 영향받지 않았으나 한국 거의 모든 록커들에게 영향을 줬다. 지저분한 퍼즈톤 위에 깔리는 김창완의 나레이션에 가까운 나지막한 노래와 관조적인 가사는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상당히 충격이었다고 한다. 실험적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넘어서 사랑받는 강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중기와 후기를 거쳐가면서 산울림은 포크락과 디스코 등 딱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였고 계속적으로 많은 한국 록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의 발라드 노래들은 초기의 록적인 감성을 후퇴했지만 대중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이유가 훗날 리메이크했던 <너의 의미>가 바로 이 시기의 곡이다.

 

그러면서도 정규 앨범 사이사이에 <개구쟁이> <산할아버지>, <외계인 ET>와 같은 동요 앨범을 내기도 한다. 산울림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노래와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동시에 작곡할 수 있는 다양한 감성을 소화할 수 있는 밴드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08 1 29일 드럼을 담당하고 있는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 직장에서 눈길에 지게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지게차에 깔려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 이로 인해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 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로써 산울림은 해체하고 긴 전설의 막을 내린다.

 

여담이지만 활동 당시 유난히 심의 태클을 많이 받은 밴드 중에 하나다. 당시는 악보 검열, 가사 검열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산울림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이게 왜 심의야" 하고 놀라겠지만 이게 다 그 심의 필터에 걸러져서 나온 물건이라고 한다. 참고로 심의 사유는 퇴폐 내지는 가사가 너무 슬프다 등등 대표적으로 1집은 모든 곡이 싸그리 심의에 걸렸고 "아니 벌써"의 경우 가사를 전체적으로 갈아 엎었다고 한다. 김창완 본인의 말로는 개작 전 가사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굉장히 비관적이고 우울한 가사였다고 한다. 이외에 3집의 "내 마음"도 원래 "황무지"라는 제목이었다가 바뀌었다. 이후에 김창완이 그 울분(?)을 뒤에 풀어낸 노래를 김창완밴드의 산울림 리마인드 앨범에 묶어 발매했는데, 제목도 '금지곡'이고 노래 내용도 '인생 그거 쉬워요. 동물 학대하지 말고 자연을 지켜요.' 이런 내용이다. 사실 내용을 보면 지금도 19금 먹고 가사를 변경해야 할 암울한 곡들이 심히 많다.

평가 

산울림은 1975 '대마초 파동' 이후의 한국 락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에 의한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한국 락음악은 거의 뿌리가 뽑혀나갈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1980년대 중반 블루스, 하드락, 메탈 등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를 얻고 오버그라운드까지 올라와 재기하기까지 약 10년 간의 한국 락 음악의 암흑기를 대표하는 밴드로 꼽힌다. 보통 음악이라면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기 마련인데, 산울림은 활동 당시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은' 밴드로 평가된다. 오히려 전성기에서 한참 지나 90년대 후반부터 탄생한 밴드들을 산울림의 후계자로 평가할 정도다.

 

산울림한테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훗날 헌정 앨범을 내기도 했다. 신중현이 대한민국 최초 헌정 앨범이고 두 번째가 산울림이다. 산울림의 영향력은 한국을 넘어 일본으로도 전해졌는데 산울림, '신중현과 엽전들'의 일본인 카피밴드 '곱창전골'이 있었을 정도다.

 

산울림의 경우 기본적으로 당시 서구에 생겨났던 프로토펑크에 60년대 사이키델릭을 얹은 사운드의 독창성, 그럼에도 여러 가지 장르 및 기법을 섭렵하고 시도했던 실험성 등이 높이 평가받는다. 물론 그들이 프로토펑크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고, 서구의 6070 시대 록의 화려함과 강렬함을 한국의 열악한 환경 및 설비 속에서 재현해내려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러한 독특한 결과물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80년대부터는 팝, 포크 지향적이고 한국적인 음악을 주로 구사하기도 했지만, 이 때는 오히려 록 밴드로서의 의미는 살짝 퇴색했다. 물론 후기가 꼭 팝적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프로그레시브적인 측면이 강해진 부분도 있지만, 삼형제가 나이가 듦에따라 훨씬 음악이 부드러워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결과 '한국적인 면'보다는 '록 밴드로서의 시대적, 음악적 가치', 즉 음악 개척자적인 면에 더욱 무게를 두는 외국 청자들은 주로 산울림의 초기 음악을 상당히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시대에 저항하는 이미지가 더욱 확고하면서도 완성된 형태의 음악을 구사하며 동시에 한국적인 감성을 지향했던, 1980년대 사운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들국화의 평이 높다.

 

요약하면 산울림은 '록 밴드'로서의 기능 측면에 초점이, 들국화는 '한국 음악'으로의 감성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둘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라는 것은 확실하다.

1기: 독보적인 창작

그야말로 파격을 통해 전설의 반열에 오른 산울림의 초기 앨범들. 시대를 감안하여 듣는다고 해도 '구린' 프로듀싱 상태이며, 필을 살리기는 커녕 기본적인 박자도 맞추지 못하고 삑사리를 낼 정도로 처참한 연주력을 보여주지만, 오직 충격적인 독창성 하나로 전설이 된 작품. 이런 음악들은 1977년 당시의 영미권 음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데, 당시 영미권 음악은 펑크 록과 디스코로 양분되어 격변기를 겪은 반면 산울림의 펑크와 사이키델릭 록을 결합한 특이한 음악세계는 당시 유일무이했다. 현재도 1~3집 앨범은 외국 록 음반 수집가 들에게까지 수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영문 위키피디아에 산울림을 치면 영어로 쓰인 Sanulrim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될 정도다.# 대표곡은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는 이미 나", ''나 어떡해", "문 좀 열어줘" . 이 시기 산울림 음악을 특징짓는 요소는 김창완의 퍼즈기타와 콤보 오르간의 전면적인 사용을 통한 사이키델릭의 탐구였다. 참고로 앨범의 오르간 연주는 김창완의 사촌여동생인 김난숙씨가 연주하셨다. 3집의 타이틀곡 내 마음은 김창훈이 자다가 일어나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자기가 어떻게 그 곡을 만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김창완이 자신의 라디오에서 밝힌 적이 있다.(...) 이 당시 데뷔와 제작 과정에 대해 잘 설명되어있는 글.

  • 1977년 1집 《아니 벌써》 :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문 좀 열어줘〉
  • 1978년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어느날 피었네〉, 〈나 어떡해〉
  • 1978년 3집 《내 마음》 : 〈내 마음〉, 〈그대는 이미 나〉

2기: 김창완의 솔로 체제

두 아우의 군 입대로 어쩔 수 없이 김창완 혼자 활동한 시기로 1기와 3기의 과도기적 성향을 보인다. 대표곡은 "빨간 풍선", "오솔길",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찻잔". 동요 1집의 "개구쟁이" 도 유명하다. 기존의 로킹한 밴드 사운드와 어쿠스틱 기타를 활용한 포크가 혼재되는 경향을 보인다.

  • 1979년 동요 1집 《개구쟁이》
  • 1979년 4집 《특급열차》 : 〈특급열차〉, 〈우리 강산〉
  • 1979년 5집 《한낮의 모래시계》 : 〈한낮의 모래시계〉, 〈이렇게 갑자기〉
  • 1980년 6집 《조금만 기다려요》 : 〈조금만 기다려요〉, 〈찻잔〉,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3기: 김창훈과 김창익의 복귀, 인기 절정

1기의 퍼즈톤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운드가 세련되어졌으나 그만큼 원초적이고 거친 에너지도 감소되었다. 10집을 끝으로 사실상 산울림의 공식적인 활동이 중단되었다. 대표곡은 "가지 마오", "독백", "청춘", "먼 나라 이야기", "회상", "너의 의미", "산 할아버지" 등으로 오늘날까지 불리는 아름다운 발라드 노래들이 이 시기에 많이 작곡되었다. 사운드는 보다 포크나 포크록에 가까워진 것으로 평가된다.

  • 1981년 7집 《가지마오》 : 〈가지마오〉, 〈독백〉, 〈청춘〉
  • 1981년 동요 2집 《산할아버지》
  • 1982년 8집 《새야 날아》 : 〈새야 날아〉, 〈내게 사랑은 너무 써〉, 〈회상〉
  • 1982년 동요 3집 《운동회》
  • 1983년 9집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 1984년 10집 《너의 의미》 : 〈너의 의미〉
  • 1984년 동요 4집 《동심의 노래》

4기: 산울림의 종언

아우들이 각자 사업 등을 이유로 빠지고 김창완 혼자 활동한 시기다. 실질적으로 김창완의 솔로 앨범과 맥락을 같이하지만, 김창완의 솔로 앨범이 포크를 주로 한 따뜻한 음악을 수록했다면 산울림의 후기작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고독한, 쓸쓸한 정서에 한계까지 닿아 있다. 특히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가 수록된 산울림 11집은 앨범 전체가 ''라는 테마를 두고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곡은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안녕"

  • 1986년 11집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내가 고백을 하면 깜짝 놀랄거야〉, 〈안녕〉
  • 1991년 12집 《꿈꾸는 공원》 : 〈누나야〉

재결성과 김창익의 사망

신해철 등의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산울림의 재조명이 시작되고 트리뷰트 앨범이 제작되었고 다시 결성된 산울림의 13집은 초기 감성으로 회귀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마침 국내 인디씬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면서 아마추어적인 음악과 차가운 관조, 어린아이와도 같은 낙관의 정서가 떠오르던 시기기도 한데, 말할 필요도 없이 70년대에 산울림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모습이다. 대표곡은 "기타로 오도토바이를 타자", "무지개".

 

하지만 2006년 산울림 전국투어 콘서트 이후 14집을 준비하던 2008 1, 막내이자 드러머였던 김창익이 이민간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산울림은 공식 활동을 종료한다. 김창훈은 자신의 세 번째 솔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김창완은 김창완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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