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As Tears Go By - The Rolling Stones ★★

청가헌 (聽可軒) 2022. 2. 9. 16:21

As Tears Go By(눈물은 흐르고) /The Rolling Stones  1965 

한 밤에,

난 홀로 앉아,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미소짓는 얼굴들.

허나 그건 나를 위한 건 아냐.

난 홀로 앉아 바라보네.

눈물은 흐르고.

 

 

내 돈으론 모든 걸 살 수 없어.

아이들이 노래하는 걸 듣고 싶어.

내가 듣는 건,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뿐.

난 홀로 앉아 바라보네.

눈물은 흐르고.

 

어느날 밤,

난 홀로 앉아,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나에겐 익숙한 것들,

그들은 새롭다고 생각하네.

난 홀로 앉아 바라보네,

눈물은 흐르고.

롤링스톤스(the Rolling Stones)

1962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되어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록큰롤 밴드이다.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반문화(反文化)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독특한 비전을 창조하기 위해 시카고 블루스 스타일을 기반으로 1962년에 결성되었다.

그룹의 창립 멤버는 믹 재거(1943. 7. 26 영국 켄트 다트퍼드~), 키스 리처즈(1943. 12. 18~), 브라이언 존스(1942. 2. 28 영국 글로스터셔 첼튼엄~1969. 7. 3 서식스 하트필드), 빌 와이먼(1936. 10. 24 영국 런던~), 찰리 워츠(1941. 6. 2 영국 런던~)이다.

나중에 그룹에 참여한 멤버로는 믹 테일러(1948. 1. 17 영국 헤리퍼드우스터 헤리퍼드~), 론 우드(1947. 6. 1 영국 런던~), 데럴 존스(1961. 12. 11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가 있다.

롤링스톤스만큼 오랫동안 지속적인 활동과 세계적인 인기를 유지하면서 장수했던 록 밴드는 없었다. 이 그룹은 창단 이후 35년이 넘도록 세계에서 가장 큰 공연장을 가득 메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196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여러 뮤지션들, 특히 보브 딜런, 폴 매카트니, 에릭 클랩튼, 밴 모리슨 등이 록 음악의 최전선에서 개별적으로 일정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보컬의 재거, 기타리스트 리처즈, 드러머 워츠가 롤링스톤스의 핵심을 유지하면서 록 밴드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동료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롤링스톤스는 소리와 외양, 그리고 대중적 이미지의 완벽한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록 음악계 최고의 상징적인 밴드가 되었다.

유서 깊은 무대에서 그들을 소개할 때 흔히 사용하던 '세계 최고의 로큰롤 밴드'라는 말처럼 실제로 활동기간 내내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명성은 레드 제플린(1969), 에어로스미스(1970)부터 뉴욕 돌스(1973), 클래시(1977), 섹스 피스톨스(1975)를 거쳐 건스엔로지스(1985)와 오아시스(1991)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의 도전자들과 경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얻어진 시간의 결과만은 아니다.

무대 위에서의 모습을 통해 재거와 리처즈는 고전적인 록 밴드의 전형을 수립했다. 그 전형은 치장을 많이 하고 자기애에 빠진 싱어와 여위고 강박적인 모습의 기타리스트의 모습을 뜻한다.

롤링스톤스는 드러머 워츠와 베이스 연주자 와이먼과 함께 재거, 리처즈, 다양한 악기 연주가 가능한 브라이언 존스와 의기투합하여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그들은 런던 서부와 그 주변에 있는 퍼브 혹은 클럽에서 시카고 빈민가의 블루스를 기반으로 하여, 그 당시로서는 난해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지저분해 보이는 학생들과 보헤미안들로 구성된 이들 그룹의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음반 시장에서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였다. 하지만 1965년경 그들은 영국 10대들에게서 비틀스에 이어 2번째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 중반에 비틀스가 긴 머리에, 멤버 간의 조화를 고려하여 양복을 맞춰 입고 완벽한 매력을 선보였던 데 반해, 롤링스톤스는 심하게 긴 머리에 제멋대로인 의상을 입고 전체적으로 난폭한 인상을 풍겼다. 비틀스의 음악이 이전보다 더 점잖아지고 편안해지면서, 롤링스톤스는 좀 더 반항적이고 불순한 이미지로 변모해 더욱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롤링스톤스, 특히 재거·리처즈·존스는 마약을 복용하는 등 모든 면에서 타락한 듯 보여 경찰과 언론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사생활에서 마리화나, 섹스, 술을 좋아하는 것은 비틀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버킹엄 궁전에서 환영받았고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5등훈장을 받았다.

롤링스톤스의 초기 공연 곡들은 주로 1950년대 블루스 및 로큰롤 거장들의 곡을 다시 살려낸 노래들이었다.

그들이 발표한 처음 5개 싱글과 최초 2개 앨범에 담긴 노래들은 외부 사람들이 작곡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틀스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로부터 자극을 받은 재거와 리처즈는 자신들의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그룹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이것은 롤링스톤스라는 밴드가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는 생명력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재거-리처즈 팀이 그룹의 창의성을 굳건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룹 초기에는 존스가 밴드의 구심점으로 롤링스톤스의 음악을 주도했다.

그는 밴드에서 가장 잘생긴 외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밴드 멤버들 가운데 가장 재능 있는 연주자였다. 하지만 그는 작곡에는 재능이 없어서 점차 그룹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자신들의 창작곡만으로 구성된 그룹 최초의 앨범 〈애프터매스 Aftermath〉(1966)는 존스의 음악적 텍스처(음구성 원리)상의 묘기로 채워졌다. 이 앨범에서는 그의 기타 및 하모니카 연주뿐만 아니라 마림바와 덜시머, 시타 및 갖가지 키보드 연주들이 특징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후 그는 창의력과 그룹 내 영향력에서 모두 힘을 잃어갔다. 그는 우울증을 앓는 마약 중독자로 전락했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 몇 주 전에 밴드에서 제외되었다.

재거-리처즈 작곡 팀 최초의 진정한 명반인 〈새티스팩션 Satisfaction〉이 1965년에 발표되었다. 그룹은 혁신적인 인기 싱글들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1966년을 성공적으로 맞았다. 이러한 명곡들로는 〈페인트 잇 블랙 Paint It Black〉, 〈나인틴스 너버스 브레이크다운 19th Nervous Breakdown〉, 〈겟 오프 마이 클라우드 Get off My Cloud〉, 〈해브 유 신 유어 마더, 베이비 Have You Seen Your Mother, Baby〉, 〈레이디 제인 Lady Jane〉이 꼽힌다.

비틀스가 보여준 창의성의 정점이었던 아트 팝(art-pop)과 사이키델릭 시대는 롤링스톤스에게 있어 침체기였다.

기묘함과 '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가 만개했던 시대는 이 그룹이 가진 본질적 어둠이나 파격적 에너지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룹의 사이키델릭 음반 〈데어 세이태닉 매저스티즈 리퀘스트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1967)와 함께 발표한 싱글 〈위 러브 유 We Love You〉는 모든 면에서 비틀스의 우위를 보여준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밴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허약한 반격이었다.

이 앨범은 그룹의 전설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들은 외견상 스튜디오나 순회공연만큼이나 법정과 감옥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앞길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시대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면서, 롤링스톤스는 1968년에 그룹의 획기적인 싱글로 평가받는 〈점핑 잭 플래시 Jumpin' Jack Flash〉와 명반으로 알려진 〈베거즈 뱅퀴트 Beggars Banquet〉로 음반사에 새로운 족적을 남겼다. 〈점핑 잭 플래시〉는 앨범의 분위기를 그들의 음악적 근간인 블루스-록과 다시 연결시켜 만든 것이었다.

롤링스톤스는 존스를 대신하여, 거장이었지만 표면에 나서지 않는 기타리스트 믹 테일러를 영입하면서, 그룹의 고유한 스타일에서 벗어난 사이키델릭으로의 외도로부터 1969년에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최고의 록 순회공연으로 주목받았다.

1970년 말 비틀스가 해체되었고, 지미 핸드릭스는 사망했다. 그리고 레드 재플린은 수면 위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재플린의 5개 앨범이 성공을 거둔 반면 롤링스톤스는 비록 1개 앨범만 성공했지만, 어느 그룹도 록의 신전에서 롤링스톤스의 위치에 맞서는 그룹은 없었다.

게다가 브라이언 존스가 사망하고 테일러가 무대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이 되자, 재거는 리처즈의 오른팔 위치에서 밴드의 공동 리더로까지 올라갔다.

〈점핑 잭 플래시〉와 더블 앨범 〈엑스자일 온 메인 스트리트 Exile on Main Street〉(1972)가 발표될 때까지의 기간은 롤링스톤스에게 창의적이고 상징적인 절정기로 기억된다. 스튜디오 앨범인 〈렛 잇 블리드 Let It Bleed〉(1969)와 〈스티키 핑거스 Sticky Fingers〉(1971), 공연 실황 앨범 〈겟 여 야-야스 아웃! Get Yer Ya-Yas Out!〉(1970)의 발표 등 이 시기 그들의 활동은 그때까지 그들을 규정하고 그 이후 그룹이 계속해서 보여주었던 전형적 레퍼토리와 이미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섹스, 마약, 악마주의, 급진적 정치를 뒤섞은 선동적인 결합은 재거의 아이러니한 거리감과 리처즈의 누더기 옷이 주는 강렬함이 더해져 독특함으로 굳어졌다.

이 시기 그들의 음반과 공연은 무너져가는 반문화의 모순에 대한 사운드트랙을 탐험하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도어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프랭크 자파의 마더 오브 인벤션 같은 몇몇 그룹을 제외한 거의 모든 그룹이 사이키델릭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였다.

그룹의 음반 제작은 처음에는 글린 존스와 지미 밀러에 의해 이루어지다가 재거-리처즈 팀으로 바뀌었다.

이때 재거-리처즈 팀은 스스로를 글리머 트윈스라고 지칭했다. 글리머 트윈스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시기의 곡에서 보여지는 음악적 특징에는 컨트리 음악이 덧붙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 앨범은 〈베거즈 뱅퀴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음악적 명암을 인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어쿠스틱 기타 텍스처를 점점 더 많이 추가했다.

하지만 당대의 어둠의 심장부 안에 블루스적 색채를 강하게 투영시킨 일은 쓰디쓴 열매를 맺었다.

캘리포니아 주 리버모어에 있는 알타몬트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재앙에 가까운 프리 록 페스티벌 콘서트에서 보안요원으로 고용한 헬스 앤젤스가 한 젊은 흑인 남자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공연은 1969년 미국 순회공연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건을 목격한 공연 관람객들은 롤링스톤스가 가진 타락과 위험의 아우라가 그 비극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그들 음악의 작품성은 〈엑스자일 온 메인 스트리트〉 이후 기울기 시작했다.

재거와 리처즈는 상류층과 하층민의 모습을 둘 다 보여주면서 그룹이 가진 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즉 싱어는 제트셋족(여행과 출장을 자주 다니는 상류층을 일컫는 말: 역자 주)의 일원이 되었고, 기타리스트는 상습적인 마약 중독자가 되었다. 1977년 리처즈는 이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인생과 그룹의 미래를 모두 구했다. 1975년 테일러가 밴드를 떠나면서 우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우드는 밴드그룹 페이스의 전 멤버였다.

〈섬 걸스 Some Girls〉(1978), 〈이모셔널 리스큐 Emotional Rescue〉(1980) 등의 앨범이나 싱글 〈스타트 미 업 Start Me Up〉(1981)의 발표로 조명을 받은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롤링스톤스의 여러 앨범과 싱글들은 점차 기대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의 순회공연은 여전히 큰 수익을 올렸다. 그들은 심지어 1980년대 후반에 재거와 리처즈 사이에 벌어진 공공연한 분쟁 이후 잠시 밴드를 해체하기도 했다. 두 리더는 솔로 앨범을 여러 장 발표했으나, 음반 시장에서의 성과는 변변찮았다. 이들 앨범에 대한 평가에서 리처즈는 재거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다.

팀의 갈등이 해결되면서 롤링스톤스는 1989년 〈스틸 휠스 Steel Wheels〉의 앨범과 순회공연을 위해 다시 모였다.

1992년 와이먼이 은퇴하고 데럴 존스가 순회공연에 합류했다. 데럴 존스는 이전에 그룹 마일스 데이비스와 스팅에서 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스튜디오 작업을 위해 많은 초대 뮤지션들이 와이먼을 대신했다. 재거, 리처즈, 워츠, 그리고 우드는 롤링스톤스의 멤버로 꾸준히 활동했다. 그들이 순회공연을 할 때마다 노령의 거장들이 여전히 포효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수천 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이 반란자들은 최고의 살아 있는 제도(制度)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록 밴드로 남아 있었다.

몇몇 저명한 감독들이 롤링스톤스의 강렬한 열정을 스크린에 담아내려고 시도했다.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은 인상주의적인 영화 〈심퍼시 포 더 데블 Sympathy for the Devil〉(1968)로, 핼 애시비 감독은 〈레츠 스펜드 더 나이트 투게더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1982)로 그런 작업을 시도했다.

이런 작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데이비드 메이슬스, 앨버트 메이슬스, 샬럿 즈워린이 제작한 〈김미 셀터 Gimme Shelter〉(1970)이다. 이 작품은 롤링스톤스의 1969년 순회공연과 알타몬트 스피드웨이에서의 콘서트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최근에는 호평을 받은 그룹 앨범 〈어 비거 뱅 A Bigger Bang〉(2005)이 발표된 이후, 그룹의 오랜 팬이었던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롤링스톤스 공연의 웅장함보다는 연주자들로서의 밴드 모습에 초점을 맞춘 〈샤인 어 라이트 Shine a Light〉(2008)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여전히 21세기의 록 음악계에서 롤링스톤스가 비중 있는 존재임을 확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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