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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now or never (O Sole Mio) – Elvis Presley ★★★

청가헌 (聽可軒) 2022. 2. 19. 16:55

It`s now or never (O Sole Mio) / Elvis Presley 

It's now or never

Come hold me tight Kiss me my darling,
Be mine tonight
Tomorrow will be too late
It's now or never My love won't wait..

지금 아니면 안돼요
날 꼬옥 안아주세요 키스해줘요 오늘밤 내 사랑이 되어주세요
내일이면 너무 늦어요
지금 아니면 내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아요..

1. When I first saw you With your smile so tender
My heart was captured My soul surrendered
I spent a lifetime waiting for the right time
Now that you're near the time is here at last

너무나 부드러운 그대의 미소를 처음본 순간
내 마음은 사로잡혔어요 내 영혼마저 빼앗겼지요
난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어요
이제 그대가 곁에 있으니 마침내 그 순간이 오고 만거죠

 

2. Just like a willow We would cry an ocean
If we lost true love and sweet devotion
your lips excite me Let your arms invite me
For who knows when we'll meet again this way

 

버드나무처럼 우리는 수없이 울었었죠
우리의 진실한 사랑과 진한 헌신들을 잃었을때 말이죠
당신의 입술은 나를 자극하지요 당신 팔로 날 안아주세요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만날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록 앤 롤의 히트곡이 많지만, 록 앤 롤을 부른 어떤 가수들도 엘비스 프레슬리가 얻은 것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프레슬리는 1935년 미시시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13세에 멤피스로 이주했다. 그는 음악에 입문하기 전에 공장에서 일했고, 트럭을 몰았다. 18세 어린 나이에 지역 레코드 스튜디오로 가서 4달러를 주고 노래를 녹음하고 음반을 만들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줄 선물이었다. 2, 3개의 음반을 더 만든 6개월 후(선 레코딩 회사와 사장 샘 필립스가 주도했다.), 그의 음반들은 갑자기 라디오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엘비스는 그룹을 이끌고 남부 지방을 순회했다. 1955년 여름, 첫 번째 투어에서부터 히스테리가 시작되었다. 한 컨트리 가수가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빨간 바지와 녹색 코트, 핑크빛 셔츠와 양말을 신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왔다. 그는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짓고 마이크 뒤에 5분간 서 있었다. 아마 행동을 개시하기 전인 것 같았다. 그는 기타를 한 번 튕기고 줄 2개를 끊었다. 그래서 줄은 덜렁덜렁했는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그런데 어린 고등학생 소녀들이 소리를 지르고 기절을 하고 무대로 뛰어 나오고 난리였다. 그러자 그는 엉덩이를 정말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기타를 가지고 한 것 같이 말이다. 이때가 엘비스가 막 19세가 되었을 때였다. 텍사스의 킬고레에서 있었던 일이다.

1957년 엘비스 프레슬리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이것을 더 부추겼다. 프레슬리는 에드 설리번 쇼에 나왔는데 그것은 당시 가장 유명한 텔레비전 쇼였다. 엘비스는 등장하고 몇 달 안에 차트 1위를 기록하는 곡들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하운드 독(Hound Dog)〉, 〈올 슉 업(All Shook Up)〉 같은 곡이었다.

새로운 라디오 포맷인 탑 40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들을 끊임없이 내보냈다. 엘비스는 1956년 영화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에도 등장했다. 그 후에도 그는 31편의 영화를 찍었다.

이 시기 후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로커빌리 사운드에서 좀 더 주류적인 센티멘털한 발라드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후 몇 십 년간 팝 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부드럽고 받아들이기 쉬운 엘비스의 음악은 더 폭넓은 관객들을 끌어 모았고, 더 많은 음반 판매로 이어졌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살아 있는 동안, 녹음된 음반 사상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2억 5천만 장 이상이 팔렸다. 가수로서 엘비스가 상업적으로 성공하자, 엘비스와 관련된 산업도 생겨났다. 1950년대 후반 팬들은 엄청나게 다양한 ‘엘비스 상품’들을 구매했다. 거기에는 바비 삭스(발목까지 오는 양말), 블라우스, 스커트, 신발 심지어 립스틱(예를 들면 ‘하운드 독’ 오렌지)도 있었다. 엘비스 파자마, 엘비스 베개, 어둠 속에서 빛나는 엘비스 포스터도 있었다. 1957년까지 엘비스 산업은 5천 5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 입지전적인 남자는 이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과 부모를 위해 멤피스에 그레이스 랜드라는 저택을 구입했다. 그리고 캐딜락과 비행기, 수백 대의 텔레비전을 사들였다. 그러나 바로 그 명성이 그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프레슬리의 저택 그레이스 랜드의 정문

엘비스는 우울증에 걸렸고 종종 폭력적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10대의 섹스 우상이 점차 마약과 알코올에 빠져서 과체중과 마약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서 마약을 하고 번쩍이는 금속이 박힌 터질 듯한 의상을 입고 노래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77년 42세의 나이에 숨졌는데, 그는 상업적인 대중 음악계의 희생자였다.

 

반항

엘비스 프레슬리는 초창기에 미국 젊은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그 무엇을 상징했다. 바로 자유와 반항의 상징이었다. 그의 독특한 의상, 음악의 메시지 그리고 그의 생생한 섹슈얼리티는 새롭게 성장해가는 미국의 10대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항의 정신은 전파를 탔다. 제임스 딘(James Dean)은 폭주하는 변덕스러운 반항정신을 영화 〈에덴의 동쪽(East of Eden)〉(1953)과 〈이유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1955)에서 표출했다. 젊은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는 〈위험한 질주(The Wild One)〉(1953)에서 모터사이클 갱의 멤버로 나타났다.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1954)에서는 골칫덩어리 항만근로자로 출연했다. J.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Catcher in the Rye)(1951)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불만에 가득 찬 10대에 대한 소설로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거칠고 반항적인 정신은 무엇보다도 록 앤 롤이란 용어를 대중에게 알린 노래에서 잘 포착되는데, 〈록 어라운드 더 클락(Rock Around the Clock)〉이 그것을 대표한다. 빌 헤일리와 커밋(Bill Haley and the Comet)이 부른 이 노래는 1954년에 처음 나왔지만 1955년에 다시 재발매되었다. 이후 10대의 폭력과 반항을 그린 영화인 〈블랙보드 정글(Blackboard Jungle)〉의 오프닝과 클로징 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대 히트를 쳤다. 빌 헤일리는 나중에 록 앤 롤이 어떻게 태어났는가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처음에 컨트리 앤 웨스턴 그룹으로 시작했는데, 거기에 리듬 앤 블루스 분위기를 가미했다. 그때는 그것을 록 앤 롤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우리는 록 앤 롤을 연주하고 있었다.”

록 앤 롤은 195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댄스 열광과도 연관된다. 스쿨 댄스, 고교 삭스 홉 파티, 피크닉에서 록 앤 롤 음악이 넘쳐났고, 그 음악에 맞춰 10대들은 자이브와 스윙을 추었다.

록 앤 롤은 이전의 몇 백 년간 대중 음악을 지배했던 부드러운 음악 양식에 극적인 변화가 생겨남을 의미했다. 그것은 거칠고 시끄럽고 전기적이며, 강렬하고 걸걸했다. 대다수의 초기 록 앤 롤 노래들은 빨랐다. 그리고 비트도 있었다. 모든 마디의 첫 박자에 악센트가 주어졌다. 사운드와 가사는 명백하게 성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1950년대 미국의 사회정신에서 중심적인 문제가 될 현상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세대 차이의 문제였다.

어른들은 대부분 대중 음악의 부드럽고 센티멘털한 사운드를 좋아했고 그들은 록 앤 롤의 도발적인 면에 충격을 받았다. 1956년 타임지는 다음과 같이 구세대의 태도를 표명했다.

록 앤 롤(Rock’ n Roll)이 그럴 의사가 없는 청취자에게조차 신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거대한 진동이 인체의 리듬 작용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은 그것을 최대한 구현해 내려는 의지로 충만했다.

지방 경찰은 록 앤 롤 춤을 금지했다. 라디오 디스크자키들도 자신의 쇼에서 록 앤 롤을 몰아내는데 합류했다. 하원에서 연설도 했다. 종교 지도자들도 록 앤 롤을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는 록 앤 롤을 “전염성 있는 질병”이라고 칭했다. 한 작곡가는 그것을 “오염된 음향”이라고 불렀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최대의 관심사였다. 한 목사는 그를 “섹스의 탁발 수도승”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애드 설리번 쇼에 나왔을 때, 텔레비전 카메라가 그의 상반신만 잡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전설적인 엘비스의 골반돌림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록 앤 롤이 그들에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한 팬은 후일 이렇게 말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우리들의 통통 튀는 몸을 흔들게 해줬어요. 혈기왕성한 거친 동물적 록 에너지와 비트가 솟구쳤어요. 몰아치는 리듬이 열정을 불러 일으켰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