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 패티 김, 조영남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낙엽 떨어진 그 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흰 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던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헤어져 서로가 그리운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헤어져 서로가 그리운
그대 그리고 나
본명 김혜자 (金惠子)
출생 1938년 2월 28일 (84세)
서울특별시
배우자 길옥윤 (1966 - 1973)
아르만도 게디니 (1976 - )
자녀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1969년생)
카밀라 게디니(1978년 12월 30일생)
학력 중앙여자고등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침례회)
신체 168cm
데뷔 1958년 미 8군 무대
대한민국의 가수. 전설적인 디바로, 한국 현대 대중가요사에서 숱한 '최초'와 '최고'의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스탠다드 팝의 선구자, 이미자, 현미, 이금희, 한명숙, 최희준, 윤복희와 더불어 1960년대를 대표하는 명가수이자 디너쇼의 여왕.
■ 활동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여 데뷔하였고, 2년 후 1958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예명은 '린다 김' 이었는데 미국의 여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현재의 예명으로 바꾸었다. 패티김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스타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가는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해방 후 일본시장에 처음 진출한 것을 비롯해 한국가수 두 번째 미국시장 진출, 한국 여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 홀 공연[9][10], 한국 가수 최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등 사실상 현재 한국 가수들이 이뤄 낸 해외 커리어를 모두 시도한 가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시도에 의의가 있고, 본인도 자서전에서 밝혔듯 크게 고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동양여성으로서 홀로 미국시장에 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2013년, 긴 가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녀는 여러 곡의 히트곡을 냈고 누가 뭐래도 한 시대를 지배했던 대형 여성 가수였다.〈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서울의 찬가〉,〈그대 없이는 못 살아〉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이미자와의 라이벌 관계
가수 이미자하고는 라이벌 관계로서 함께 묶여 언급된다. 데뷔시기도 같은데다가 나이대도 비슷하고, 음악스타일 역시 이미자가 트로트의 여왕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강한 노래를 주로 불러왔다면 패티김은 스탠다드 팝 위주의 세련되고 서구적인 정서가 다분한 노래를 주로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교되었다. 또한 대중성 측면에서도 이미자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의 가수였다면 패티김은 세련되고 도시적인 분위기로 완전히 상반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언론이나 대중이나 둘을 항상 라이벌 관계로 묶어 자주 비교했다.
실제로도 서로 신경전이 치열했던 걸로 유명했다. 작곡가 임석호가 방송에서 밝히기를 패티김을 영입하고 싶어했던 이미자의 소속 음반사 회장이 "우리와 계약하면 이미자와 같은 급으로 대우 해주겠다"고 직접 스카웃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패티김 측에서 "최고의 대우도 아니고 이미자와 동급 대우가 말이 되냐" 라며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계약이 불발되었다. 그 외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로 방송국 측에서 패티김과 이미자를 동시에 섭외하려고 했었는데, 어느 한 쪽의 출연 순서가 뒤로 밀리면 캐스팅을 거부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1순위로 써진 큐시트를 두 가수에게 보냄으로서 겨우 캐스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먼저 도착한 가수가 리허설을 빨리 끝내고 무대에 먼저 올라가자 '나 일 있어서 무대 안 올라간다' 며 그냥 노래를 안 부르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나이가 든 뒤엔 함께 토크쇼에도 나오고 덕담도 해주는 등 디바기질이 많이 가라 앉기는 했다. 2010년에는 고인이 된 박춘석 작곡가의 추모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는데 "나는 대중가수지만 이미자는 국민가수다. 나랑 비교하기 힘들다." 라고 세간의 불화를 일축시킨 바 있다. 또 패티김 본인의 은퇴 당시 인터뷰에서는 "우리는 같은 가요계를 걸어온 동반자일 뿐, 라이벌로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라며 일축한 바 있다.
■가족
원래 길옥윤과 1966년에 결혼했으나 1973년에 이혼했고, 1976년 이탈리아 사람인 아르만도 게디니(Armando Ghedini)와 재혼했다. 아르만도 게디니와는 백년해로 중이다.
슬하에 2녀가 있지만 큰딸 최정아(1969년~)[12]는 전 남편 길옥윤의 딸이고 둘째딸 카밀라 게디니(Camila Ghedini, 1978년 12월 30일~)는 패티김이 이탈리아인인 현재의 남편인 아르만도 게디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패티김 이탈리아'라는 자동 검색어까지 있다.
그런데 장녀 최정아도 미국 백인 사위 윌리엄스와 결혼하는 바람에, 패티김의 후손은 장녀 최정아를 제외하고 전원 백인 혼혈이 되었다
차녀 카밀라 게디니는 이탈리아 혼혈로 빼어난 미인에 키까지 커서(171cm) 모델을 연상하게 하는 외모를 지녔다. 2003년에 가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당시 가수 패티김의 딸이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으며, 데뷔하기 전에 팬클럽이 형성되는 등 반응이 좋았다. 데뷔앨범 역시 당시 유명했던 유정연[15], 업타운의 정연준, 러브홀릭의 강현민 등 유명 프로듀서진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서와 맞지 않는 한국 연예계의 시스템과 문화를 많이 어려워 했고, 자신의 음악 지향점과 맞지 않는 장르를 강요받는 등 한국에서의 음악 활동을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1집을 이후로 가수활동을 접어 버린다.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웨딩플래너로 전직한 후 정착해서 살고 있다.
최정아와 카밀라는 아버지가 다른 이부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친자매 이상으로 좋은 우애를 과시하고 있으며, 최정아는 새아버지 아르만도에게 새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어린 효도를 다하고 있다.
■기타
지금봐도 굉장히 이국적인 외모로 당시에도 화제였다고 한다. 어딜 지나다니면 혼혈이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고. 키도 168cm로 지금 기준으로도 큰 키인데 그 시절에는 정말 엄청난 장신이었을 것이다. 이런 탈동양인적 외형이 당시 미8군 클럽에서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체구가 작은 동양여성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외형 덕분에 주목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런 부분을 뿌듯하게 생각했다.
이국적인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 때문에 많은 루머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누드집을 찍고 왔다' 는 루머를 비롯해서 성형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 말에 따르면 "미8군 공연 시절 쌍꺼풀 수술과 코 수술은 받은 적은 있지만 이전의 개성을 잃어버리는 듯해 코에 넣었던 보형물을 오히려 제거했고 그 외에는 얼굴에 손 한 번 댄 적이 없었다" 며 성형루머를 정면으로 부인한 바 있다 실제로 젊은 시절과 현재 모습을 보면 쌍꺼풀과 젖살이 빠진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
◈노래하는 패티김의 발음을 들어 보면 서울 출신인데도 요즘 서울 말씨와 억양과 발음이 좀 달라 북한 사람들 말투 비슷한데, 이것이 당시의 서울 사투리이다.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광팬으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20] 한 번은 자신의 딸에게 "내가 마이클 잭슨이 너무 보고싶은데 그 분 집 앞에 가서 꽃이라도 놓고 가면 안 될까?" 라고 말하자 "엄마. 마이클 잭슨이 무슨 옆집 이웃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팬이 만나고 싶다고 무작정 만나주는 게 어딨냐." 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휘트니 휴스턴 역시 가장 좋아했던 아티스트로 내한 당시 콘서트를 갈 정도로 팬이라고 한다. 원래 자신에게 초대권이 왔었는데 일부러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직접 제일 앞자리를 예매해서 봤다고. 당시 휘트니 휴스턴이 왠 백발의 여성이 자신의 노래에 열광하며 따라부르는 게 신기해서 직접 객석으로 다가가 인사도 나눴는데, 객석에서 패티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들 놀래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굉장히 자기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이미 칠순이 훨씬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운동과 목관리로 전성기때 컨디션을 유지해 왔다. 매일매일 5km씩 걷기 운동과 요가를 비롯해 수영 1500m를 한다고.[21] 식이요법도 철저해서 데뷔 후 배불리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22] 그 때문인지 은퇴 기자회견 때는 7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몸매와 패션감각으로 화제가 되었다.
◈절친으로 잘 알려진 연예인은 조영남. 사석에선 아예 누이, 동생라고 일컬는 사이이다. 패티김이 은퇴 당시 자서전을 쓸 때 직접 내용을 다듬고 책을 써줬을 정도였다.[23] 자서전에서는 '누나는 왜 그리 띨띨하냐' 고 농담섞인 디스를 할 만큼 친하다. 애초에 미8군 시절부터 같이 공연을 뛰던 사이이고, 연예계에 진출한 뒤로도 쭉 죽마고우 하던 사이였기 때문에 안 친한 게 이상할 사이이기는 하다. 고 쟈니 윤과도 함께 친했나 보다. 조영남이 같이 쟈니윤쇼를 할 때, 자니윤이 튀김이-(패)튀김, (조)영남이, 자신을 (쟈)니윤이, 앞글자만 해서 조.패.자(존나게 패자) 삼인조 라고 섹드립 섞어 부른 일이 있다.
◈무대욕심이 엄청나서 원래 방송국측에서 배정된 예산에 직접 사비를 들여서 무대를 꾸미는 걸로 유명했다. 방송인 이상벽이 밝히기를 일반적인 가수에게 배정된 출연료가 200만원이면 '난 500만원 주세요. 난 패티김이니까' 라며 출연료를 협상했고, 요구가 거두어지면 자신의 사비를 더 보태서 무대 연주 세션도 훨씬 고급으로 채우고 연출도 훨씬 신경써서 꾸몄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공연장에서는 화장실에서 팬과 만날까봐 대기실에서 요강을 쓰고, 무대 위에서는 배에서 소리가 날까봐 아예 가슴 아래로는 마이크도 안 댈 정도로 철저히 무대에 임하는 걸로 유명.
출생 1945년 5월 13일
황해도 평산군
배우자 윤여정(1972년 결혼; 1984년 이혼)
백은실 (이혼)
가족 조승초 (아버지), 김정신 (어머니)
조영수 (동생)
조얼 (장남), 조늘 (차남)
종교 개신교
조영남(趙英男[1], 1945년 5월 13일 ~ )은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 학력
삽교초등학교 (졸업)
삽교중학교 (졸업)
강문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성악과 (중퇴)
서울대학교 성악과 (중퇴)
트리니티대학교 신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1968년 학비를 벌기 위해 미군 악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곡으로는 화개장터 모란동백등이 있다.
■ 초기 활동
황해도 평산군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1951년 한국 전쟁때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이 중공군을 피해 1.4 후퇴를 할 때 온 가족이 LST미국 군함에 몸을 실어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면으로 피란했고 어린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배우 백일섭과는 고등학교 동문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조영남은 처음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개인사정으로 자퇴하고 196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하였다. 서울대 재학 중 세시봉, 오빈스 케빈 등 캠퍼스 가수로 명성을 얻었다.
■가수 활동
대학에 다니던 1968년에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삼아 미8군 부대의 주한 미 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1969년에 영국 가수 톰 존스가 발표해 영국 싱글차트 2위까지 오른 팝 가요〈딜라일라 (Delilah)〉를 한국어로 번안한 곡으로 김인배 편곡집에 수록되어 1969년 대한민국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데뷔 이후 대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수로 활동하는 데에 어려웠기 때문에 잠깐 '고철(高哲)'이라는 예명으로 작사가 활동을 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자퇴하고 세시봉이라는 음악 다방에서 윤형주, 이장희, 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등 여러 가수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조영남은 세시봉 활동 때 김시스터즈 내한 공연에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는데,〈신고산 타령〉을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로 개사하여 불렀다가 미움을 사서 군대에 입대하였다. 군 복무 중에 당시 대통령 박정희 앞에서 이애리수의〈황성옛터〉를 부를 것을 요청받았지만 분위기를 띄울 목적으로〈각설이 타령〉을 불러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변호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는 그림그리는 취미를 길러 화가 수준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현재 그림 대작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 귀국 이후
198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고 가수 김도향과 함께 음악작업을 하면서 그와 함께 음반을 발매하며 활동을 해왔다. 1987년에는 주시경 선생을 존경한다는 신념에 따라 사극 MBC 드라마 《한힌샘》(MBC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였다. 한편 조영남은 결혼 후 윤여정 사이에 2남을 두었으나 성격 차이와 본인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점으로 결국 1987년에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공백기를 가졌다. 공백 기간 동안 조영남과 같이 지내며 의지가 되어주었던 김한길과 함께 지냈을 무렵, 어느 날 신문에 화개장터 기사를 보고 소설가로 활동하던 김한길이 가사를 쓰게 되었다. 그 가사에 조영남이 직접 작곡한 멜로디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곡명을 〈화개장터〉로 하고 앨범을 발표하였다. 데뷔 이후 번안곡이나 성가를 주로 불러 국민들에게 널리 불리는 히트곡이 없었는데 〈화개장터〉가 히트하면서 조영남을 TOP 가수 반열에 오르게 하여 80년대 최고의 가요로 자리잡았다. 또한 사랑노래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도 김한길이 작사하였고 이 곡도 히트하였다. 1988년에 두 곡이나 히트하게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정상에 오른 조영남은 여러 공연과 무대에 출연하여 인기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 다양한 활동
1989년에 자니 윤이 진행하는 KBS 2TV 《자니윤 쇼》에 보조 진행자로 활동한 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수로서의 조영남보다는 방송인으로서의 조영남이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1993년에 이경실과 함께 1대 진행자를 맡은 KBS 2TV 《체험 삶의 현장》이 주목을 받았다. 윤여정과 이혼 후 1995년에 백은실과 결혼하고 딸 조은지를 입양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현재는 딸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일어난 와우 아파트 붕괴사건이 일어났을때 함경도 신민요 신고산 타령을 가사만 바꾸어 "와우 아파트가 우루루루루루 무너지는 소리에..."로 시작하는 노래로 불러 그 첫구절이 문제가 되어 신문과 뉴수에 나기도 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조영남은 가수가 아닌 화가로도 활동하면서 화투그림을 그려 자신만의 화투화가의 영역을 개척했다고 알려졌으나, 200편 이상을 대작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약 10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2005년에 저술한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에서 각종 친일 발언으로 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10년 1월 3일 새벽 0시 경에 경미한 뇌졸중 초기 증상으로 서울 강북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완쾌되는 등 건강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였었으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 DJ로 다시 복귀, 이후 12월에는 데뷔 41년 만에 모두 신곡으로 이루어진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에 거주하며, 2010년 조영남의 청담동 집이 연예인들 중에서 가장 비싼 집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4]
2011년 12월 조영남의 미술작품이 현대자동차 갤러리를 장식했다. 2012년 8월에 조영남이 작곡하고 김연식 태백시장이 작사한 〈태백의 노래〉를 선보였다.
■ 사건
조영남은 각종 친일 언행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켰었다. 우선 2005년 1월 9일 방송된 MBC의 다큐멘터리 '거울속의 한일', 1월 1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등 언론을 통해 친일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5][6]이후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의 출간과 독도와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하여 일본 산케이 신문과 진행한 인터뷰 중 '일본이 한 수 위이다' 등의 발언을 하여 더 큰 논란에 휩싸였다.[7] 이러한 친일 발언으로 인해 결국 자신이 진행을 맡고 있던 KBS 1TV의 프로그램 《체험 삶의 현장》에서 하차하게 되었다.[8]
2009년 1월 10일, 자신이 진행하는 MBC 표준FM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에 대해 "점쟁이같은 모르는 남의 말을 추종하는지 모르겠다. 다들 믿다가 잡아보니 별 이상한 사람이고 다 속았다."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불러왔다.[9] 결국 조영남이 1월 12일 방송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를 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10]
2011년 9월 21일, KBS 2TV의 《빅브라더스》 방송 중 게스트로 출연한 소녀시대의 태연에게 기습적으로 포옹을 시도하였다는 논란이 발생하였다.[11]
2015년 8월 29일 《불후의 명곡 2 -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그룹 이름 마마무를 엄마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여 네티즌과 마마무 팬클럽의 비난이 KBS 홈페이지와 각종 사이트에 빗발친 적이 있다.
조영남은 자신이 입양한 여아에 대해 “이제 막 은지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했다. 엄청 사정해야 한 번 보여줄까 말깐데 정말 예쁘다. 환상적이다.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다운 걸 브래지어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녀야 하다니”라고 말해 큰 논란을 샀다.
조영남은 1973년 첫 개인전 이후 40회 남짓 전시회를 열며 스스로 ‘화수(화가 겸 가수)’라 표현해 온 조씨는 오래 전부터 화투 그림에 천착해 왔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적 없는 조씨는 독창성 있다는 호평과 산만 조악하다는 혹평을 함께 받아 왔다. ‘그림 대작(代作)’ 사건은 2009년 조씨가 알고 지내던 뉴욕 출신 무명 직업화가 송씨에게 자신의 콜라주 작품을 회화로 다시 그려보라고 제안한 게 발단이다. 완성품이 마음에 든 조씨는 그때부터 작품을 직접 만드는 대신 송씨로부터 200점 이상 화투 그림을 받아 덧칠 등만 한 뒤 자신 이름을 걸고 전시했다. 결국 1심 사기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으며[12] 그 이후 2018년 3월 18일 방영된 KBS 2TV 1박 2일에서 잡지(2016년 우먼센스 6월호)에 실린 본인의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2016년 7월 1일 자로 KBS·EBS·MBC 출연정지 연예인 명단에 올랐고, 나중에는 JTBC·MBN·TV조선 출연정지 연예인 명단에 올라야 했으나 현재 KBS EBS MBC 출연정지 연예인 명단에서 해제됐다. 2018년 8월 17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받았다.
녹화 방송 촬영 현장에서 사유리에게 몇명과 성관계 해봤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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