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꿈 – 조용필

청가헌 (聽可軒) 2022. 3. 12. 17:54

/ 조용필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저기 저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19503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태생이다. 경동고등학교 196925회 졸업생이다.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9], 1979"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데뷔 50년동안 꾸준하게 현역가수로 활동하고 있고 아직도 거의 매년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중이다.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를 무려 7번이나 매진시켰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수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이자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전설급의 자타공인 타종불허 가요계의 제왕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슈스케에서 김태우가 이승철을 가왕이라고 호칭하자 이승철 "그건 용필이 형이지."라면서 스스로 부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최정상급 가수들도 조용필은 소위 '논외'로 해둘만큼 치켜세울까? 그저 선배라서? 선배 가수가 한둘이 아닐텐데? 아래 영상을 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조용필은 저런 멘트를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2011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

 

■경력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 이후 1968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5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72"그룹 25"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 응원가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대표곡

대표곡은 "걷고 싶다",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내 이름은 구름이여", "님이여",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 "못찾겠다 꾀꼬리", "물망초", "미워 미워 미워", "미지의 세계",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의 노래", "Bounce", "비련", "", "상처", "서울 서울 서울", "선구자", "슬픈 미소", "슬픈 베아트리체", "어제, 오늘, 그리고", "여와 남", "여행을 떠나요",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일편단심 민들레야", "정의 마음", "창밖의 여자", "촛불", "추억속의 재회", "친구여", "Q", "킬리만자로의 표범", "태양의 눈", "한강", "한오백년", "허공", "Hello" 등 매우 많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실제로 본인도 콘서트 멘트 중 발표한 곡이 너무 많아서 다 하려면 며칠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조용필의 콘서트가 끝난 뒤 콘서트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oo가 듣고 싶었는데" 하는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멘트도 거의 없이 노래로 모든 공연을 꾸며서 타 가수들에 비해 콘서트에서 부르는 곡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이 정도니 히트곡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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