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그 언제일까 - 히파이브

청가헌 (聽可軒) 2022. 3. 13. 09:38

그 언제일까 / 히파이브

그리워도 보고파도 못보네
날버리고 떠나간 그님
그언덕 위에 새하얀 꽃잎 바람에 다지는데
눈물이 흘러내려 외로운 가슴 적셔도
그리워도 보고파도 못보네
날버리고 떠나간 그님
그언제일까 다시 만날날
그언제 오시려나
 
야속하고 얄미워도 못잊겠네
날버리고 떠나간 그님
뒷동산 위에 붉은 꽃잎들 밤새에 흩어진다
밤비가 하염없이 외로운 가슴 적셔도
야속하고 얄미워도 못잊겠네
날버리고 떠나간 그님
그언제일까 다시 만날 날
그언제 오시려나 우~~~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초까지 한국의 포크락 그룹의 황금기를 이끌며 한국 포크락 음악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He5, He6는 초기 포크락 그룹들이 외국곡을 주요 레파토리로 삼은데 반해 "초원", "당신은 몰라", "초원의 빛" 등 빛나는 창작곡을 쏟아내며 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He5는 4가이스 출신의 한웅이 주축이 되어 유영춘, 김용호, 조용남 등 미8군 무대의 실력있는 뮤지션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신인인 멤버들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아 이를 극복할 방법으로 강력한 카리스마와 인기, 실력을 겸비한 키보이스의 김홍탁을 영입하여 창립되었다. He5는 많은 멤버의 변화를 겪으면서 히식스로 거듭나고 후기 키보이스와 인기경쟁을 다투었다.

1967년 1기 He5 멤버로는 4가이스 출신의 한웅을 비롯하여 후에 영사운드 멤버가 되는 유영춘 등이 있다. (조용남:Guitar, 한웅:Keyboard, 김용호:Drums, 한광수:Bass, 유영춘:Vocal)
1969년 2기 He5 멤버로는 키보이스 출신의 김홍탁이 한광수를 대신한다. (김홍탁:Guitar, 조용남:Bass, 한웅:Keyboard, 김용호:Drums, 유영춘:Vocal)
히화이브는 1970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당대 최고의 그룹으로 군림하게 된다.

멤버 변동 끝에 히식스(He 6)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인기 정상을 달리는 여러분의 히식스”(히식스의 5집 음반에 표기된 문구다)라는 지위를 계속 누렸다. 히식스의 주무대는 서울 명동의 오비스 캐빈과 동양방송(TBC) TV의 쇼 프로그램이었다. 오비스 캐빈은 ‘젊은이의 성지’라고 불리던 라이브 공연장(당시 용어로 ‘생음악 살롱’)의 대명사였고, TBC는 젊고 도회적인 방송의 대표적 매체였다(다름 아니라 서울과 부산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9년 <원 투 쓰리 고>라는 프로그램을 본 사람이라면 히화이브가 호스트로 나와서 연주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고, 그 뒤로도 1970년대 음악 프로그램의 대명사인 <쇼쇼쇼>에서 오프닝과 엔딩을 담당하면서 연주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히식스는 <초원> <초원의 사랑> <초원의 빛> 등 이른바 ‘초원 시리즈’의 히트곡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멤버중 김홍탁은 김희갑, 정민섭, 김호 등 선배 작곡가의 곡을 받아서 연주하는 것을 탈피하여 직접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인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과 <당신은 몰라>는 마치 당시의 스냅사진 같은 히트곡들이다. 또한 <당신은 몰라>는 당시 히식스의 멤버였던 최헌이 1974~75년 그룹 ‘검은나비’에 들어가서 다시 한번 히트시킨 곡이기도 하다. 선우영아와 임성훈 등이 가수로 참여한 ‘김홍탁 작품집’도 이 시절 ‘작곡가 김홍탁’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그렇지만 ‘기타리스트 김홍탁’의 진면목은 이런 가요들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 같은 곡에서의 거칠고 무거운 기타 사운드를 들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어차피 외국 음악을 모방한 것 아닌가. 그렇지만 <히식스와 함께 고고를 vol.1/vol.2>이라는 음반을 들어보면 이런 판단을 수정하게 된다. 이 음반에는 긴 길이를 가진 잼 세션 형식의 연주곡들이 들어 있고, 그 수준은 당시의 국제적 수준에 미달하지 않는다. 인기를 누리면서도 대중과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음악인의 고집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마냥 잘나가는 것 같던 김홍탁은 1972년 갑자기 미국으로 떠난다(연예계 소식에 밝은 사람이라면 김홍탁의 후임이 가수 제이(J)의 아버지인 정희택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10월 유신’이 간접적 이유였던 것은 분명하다. 도미 뒤 김홍탁은 바보스 출신의 김선, 히화이브 출신의 한웅 등과 더불어 오리엔털 익스프레스(Oriental Express)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연주 경력을 이어가다 1980년 귀국한다. 귀국 뒤 그의 시도는 전성기 시절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다. ‘1960~70년대 그룹사운드’는 1980년대 대중문화계의 변화된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중년의 한국인들에게 세월은 빨리 흘러가고 때로 병마도 찾아온다. 김홍탁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는 1997년 동숭동에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창립한 뒤 그곳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수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완성하지 못한 ‘창작 록음악’의 아쉬움을 후학들을 길러냄으로써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 같다. 물론 그가 일선에서 물러나 교육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옛 동료들을 모아 2040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두장의 음반을 발매한 바 있고, P.S. 키보이스의 데뷔 음반이 LP로 재발매된 데 이어 히화이브와 히식스 시기의 음반들, 그리고 김홍탁 작품집도 LP나 CD로 재발매될 예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