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처럼 음악처럼 / 김현식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오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오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오 오 오
김현식(金賢植, 1958년 2월 18일 ~ 1990년 11월 1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였다. 대표곡으로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추억 만들기〉, 〈사랑했어요〉 등이 있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가수이다. 1990년 11월 1일 간경화로 인해 32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 유년기
1958년 2월 18일 서울 중구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외가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1964년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1965년)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 3학년 때인 1966년에 서울에 있는 서울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같은 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인 1968년에 서울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였으며 1970년에 전교 4등으로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 재학 시절에 기타를 처음으로 접하였으며, 아이스하키부에서도 활동하여 중학교 초반에 상위권을 유지하였던 그의 성적이 하락하였다. 그러다가 부친이 운영하던 간장공장의 부도로 집안이 어려워져서 방황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72년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하여 책을 다시 잡았다. 당시 명문 고등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고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밴드부에 들어갔으나 선배들 몰래 트럼펫을 불다 주먹다짐을 벌인 후 밴드부에서 탈퇴당하여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제출하였다.
■ 가수 활동
자퇴 후 종로의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여 다녔고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으며, 방황을 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그러다가 가수 이장희의 동생인 이승희와 한 호텔의 나이트 클럽에서 스타 가수들의 무대 사이를 잇는 들러리 역할로 듀엣 활동을 하였으며, 이승희와 결별한 후에는 김동환과 작약도에서 지옥훈련을 감행한 후 듀엣으로 활동하였다.
■ 가수 데뷔
1976년에 이장희의 주선으로 음반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1978년에 녹음 작업이 끝나고 음반이 나오기 기다리던 중 이장희가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 매료되어 장기 체류를 하고 김현식이 대마초 사건까지 연루되어 정식 데뷔를 하지 못게 되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980년에 서라벌 레코드사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타이틀곡으로 한 1집 앨범을 발표하였는데, 그 때는 그의 음악적 노선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 앨범에서 그는 맑은 미성을 바탕으로 소울 록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선보였다.
1982년에 결혼하여 그 해 12월에 아들 김완제(트래비스 킴)를 얻게 된다.[3]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공무원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인근에 피자가게까지 열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결혼이 가져다준 행복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1년 후인 1983년에 가게를 접고, 세종호텔 나이트클럽에 나가면서 밤무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 후에 크라운호텔과 하얏트 호텔에서도 활동하였다.
■ 2집 앨범
1984년에는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동아기획에 스카우트되어 그 해 10월에 '사랑했어요'를 타이틀곡으로 한 2집 앨범을 녹음하여 발표하였다. 노래가 발표되자 방송보다는 음악다방, 나이트클럽 등 다운타운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2집 활동 때까지는 주로 밤무대에서 공연을 많이 하였다. 전인권과 함께 한 그룹 '검은 나비'의 리드 싱어 및 조원익이 리드하던 그룹 '동방의 빛', 정성조의 '메신저스'에 들어가 밤무대 최고의 가수로 부각되었다.
■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결성, 그리고 본격적인 콘서트 활동
1985년에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유재하와 함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였으며 이들의 연주로 3집 앨범을 녹음하였다. 그러다가 녹음 후에 유재하가 탈퇴하고 장기호의 소개로 박성식이 들어왔으며, 1986년에 '비처럼 음악처럼'을 타이틀로 한 3집 앨범을 발표하였다. 이 음반은 30만장이상이 팔려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계산된 기획에 의해 움직이는 방송의 속성에 거부감을 느껴 방송 출연을 자제하였기 때문에 '얼굴 없는 가수'로 통하였다. 3집 앨범 발표 이후에는 라이브 극장 등에서 공연 활동을 주로 하였으며, 이정선, 엄인호 등을 만나면서 블루스로 음악적 색깔을 그려내기 시작하였다.
■ 시련과 재기
1987년 11월에 밴드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대마초,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상용 관련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그리고 사죄의 의미로 3개월 후인 1988년 2월에 삭발을 한 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63빌딩에서 재기 콘서트를 열었다.
■ 건강
1988년 재기 콘서트를 연 이후 김현식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지난 해인 1987년 전인권, 허성욱 등과 함께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 석방된 이후 금단현상으로 괴로워했고 같은 해 11월 1일 김현식이 그토록 아끼던 후배 유재하의 사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유재하가 사망한 이후 김현식은 몇 달을 술에만 매달릴 정도로 슬퍼했고, 간경화 진단을 받은 이후에도 그는 흡연, 음주를 멈추지 않았고 복수가 차올라 고통스러울 때는 소주를 마시며 고통을 달랬다. 권인하, 강인원과 함께 부른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의사는 술을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하며 음주를 멈추고 휴식을 할 것을 권고했으나 김현식은 음악 작업을 위해 병원에서 자주 탈출하여 앨범 녹음을 멈추지 않았다.
■ 사망
결국 그는 1990년 11월 1일, 음주의 의한 간경변에 의해 자택인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또는 이촌1동) 렉스 아파트에서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직전, 그 순간까지 내사랑 내곁에, 그대 빈들에라는 노래를 녹음 했다. 그 노래들은 우리들에게 남긴 엄청난 김현식의 유작이었다. 그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누나 김혜령이었다. 누나 (김혜령)는 이 사실을 동아기획 사장인 김영에게 전화로 알렸고 김영은 "그럴 리가 없어! 어제 자기 입으로 직접 내일 녹음 들어간다고 했단 말이야!"라고 답변했다. 그 후 바로 누나 (김혜령)가 바로 한영애에게 직접 "갔어요" 라고 말했는데 한영애는 오해를 하고 "스튜디오 왔다 갔다고요?" 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해서 누나(김혜령)가 "아니, 그게 아니라 갔다고요. 저 하늘로.."라고 답변하고 한영애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 후 그의 노래인 내사랑 내곁에가 음반대상에 올랐으나 그는 이미 우리의 곁에 없어서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했다. 그리고 앵콜곡은 김장훈이 부를 예정이었으나 도중에 생방송을 펑크내 장필순이 대신 앵콜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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