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강산 / 신중현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곳에 네가있고 내가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희망을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마음
우리는 이땅위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곳에 자랑스런 이곳에 살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
하얀물결 넘치는 저바다와 함께있네
그 얼마나 좋은가 우리사는 이곳에
사랑하는그대와 노래하리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훗날에 너와나 살고지고
영원한 이곳에 우리의 새꿈을 만들어 보고파
봄 여름이 지나며 가을 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너의마음 내마음 나의마음 너의마음
너와 나는 한마음 너와 나
우리 영원히 영원히 사랑 영원히 영원히
우리 모두다 모두다 끝없이 다정해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마음
우리는 이땅위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곳에 자랑스런 이곳에 살리라♪
예명 히키 신(Hicky Shin)
출생 1938년 11월 4일 (8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본관 평산 신씨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교수
장르 록, 사이키델릭 록, 소울, 로큰롤, 블루스
악기 보컬, 기타
활동 1957년 ~ 현재
학력 서라벌고등학교 (중퇴)
버클리 음악대학 (명예박사)
부모 아버지 신익균
어머니 이순자
배우자 명정강 (1960년 ~ 2018년)
자녀 장남 신대철, 차남 신윤철, 삼남 신석철
■ 성장 과정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아버지 신익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중현의 생모는 일본인이었는데, 그의 유년기 때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재혼한 후 남동생과 여동생이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인 1941년에 집안이 만주로 이사했다. 당시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미용사였다. 만주에 살던 어린 시절에는 집안에 대형 축음기가 있었을 정도로 집이 부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다만 만주에서 그가 살던 시기는 여덟살도 되기 전 삼 사년 정도에 불과했고, 해방 직후에는 집안이 다시 서울로 이사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에는 가난해졌고, 가족이 충청북도 진천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하면서 살았다. 이 때 신중현은 농사 일을 도우며 민요도 많이 들었는데 농부들이 밭 매면서 하는 노래들이나, 각설이들이 와서 문밖에서 리듬을 때리는 것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미인'같은 노래에서 한국적인 음악을 구현한 것에도 이 시기의 영향이 있었다고 신중현은 회고한다.
어쨌든 전쟁 중인 195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막내 여동생까지 잃었다. 그 후 신중현은 남동생과 함께 전쟁고아로 자라면서, 창고지기를 비롯한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창고지기를 하면서 고물 라디오로 미군 방송이나 중국 방송을 온종일 듣기도 했었는데,[8] 이것을 계기로 외국의 다양한 음악에 빠지게 된다. 그 후 거의 폐품이 되어 누군가가 내다버린 기타로 연습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설적인 뮤지션의 시작이었다.
■ 미 8군 연예단의 기타리스트가 되다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니던 1955년, 학교를 그만둔 뒤, 옷이 없어 교복을 입은 채로 미 8군 공연 팀의 조수로 부대를 출입하게 되면서 음악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미 8군 쪽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 기타 연습에 몰두하던 그의 실력을 알고, 기타를 배우고자 했던 어느 무용수의 소개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공연 장비를 나르고 심부름하며 출연자들의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일이었지만, 나중엔 무대 한쪽에서 보조로 기타를 연주하기도 하면서 점차 실력을 쌓아나간다. 드디어 1957년에 미 8군 연예단에서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데뷰 무대에서 처음 연주한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All Shook Up'이란 곡이었다. '히키 신'이라는 무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미군부대 순회 공연은 물론이고 기지촌의 클럽들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신중현은 사실 이때까지는 밴드의 프런트맨이라기 보다는 기타리스트였다. 실제로 신중현의 전성기 시절의 노래를 들어봐도 훌륭한 보컬리스트는 아니었고, 그래서 당시 기준으로 프런트맨으로 나서기에는 조금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뮤지션들 사이에선 가히 넘사벽급 기타 실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그의 기타 연주가 공연장에 울려 퍼지면 미군들이 "히키 신!"이나 "재키!"를 연호하며 열광의 도가니가 펼쳐졌다고 한다.
■ 록밴드 Add4를 결성하여 데뷔하다
1964년에 미8군 연예단을 나와서 록밴드 Add4를 결성하고 1집 '빗속의 여인' #을 발매하며 데뷔했다. 이 시기는 영, 미에서도 록 밴드 붐이 막 일기 시작한, 즉 록밴드 역사의 초창기였던 시절이다. 신중현은 이 Add4 때부터 본격적으로 밴드의 프런트맨이자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국내 첫 창작 록 음악인 '빗속의 여인'은 이후 수십년간 신중현이 만들어 발표하게 되는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의 기념비적인 첫 시작이었다.
Add4는 당시 한국에 베이스 기타를 도입한 최초의 밴드 중 하나였고, 그래서 당시 쟁쟁한 로큰롤 밴드들(키보이스 등)과 더불어 새로운 록큰롤 밴드 사운드를 재빠르게 도입한 밴드로 역사에 남았다. 키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당시 서구의 최신 음악을 최대한 재현해내는 데에 집중하거나, 엔카식의 멜로디와 록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면, 신중현은 단지 서양 록음악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서양 록음악과 구별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담은 한국화된 로큰롤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로큰롤은 너무나 생소한 음악이었다. 비록 엘비스 프레슬리나 진 빈센트 같은 뮤지션들의 몇몇 곡들이 소개되었지만 대부분의 대중들은 트로트를 들었고 외국 음악은 여전히 생소한 음악이었다. 심지어 스탠더드 팝(프랭크 시나트라, 폴 앵카, 빙 크로스비 등)같은 음악도 철저히 외국 것이었기 때문에 확산에 한계가 있었다. 이런 당시 한국 대중음악 토양의 한계로 인해 Add4의 데뷰 앨범 "빗속의 여인"은 그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고 대중음악의 판도 자체를 바꿀 만큼 큰 임팩트는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소수가 즐기던 클래식 음악만이 고급 음악으로 인정 받을 때였고 대중음악은 '싸구려 유행가'나 '저질 음악' 취급을 받을 때이다. 그래서 당시 한국에서 음악에 관심 있는 리스너들은 클래식, 재즈, 영화음악 정도를 들었고 그외 일반 대중들은 트로트를 주로 들었기 때문에, 록음악은 (선구적인 소수의 애호가들을 제외하면) 그 어느 쪽에서도 별 관심을 못 받는 소외된 장르였다. 1960년대 동시대의 서양과 일본 등에선 록 음악이 대세로 떠오르던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던 것. 나중엔 한국에서도 드디어 1970년대 초반부터 록음악과 포크음악이 청년층에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서양과 일본 등 주요 국가들에 비하면 수 년이나 늦은 셈이다.
■ 신중현 사단의 전설이 시작되다
한국에서의 록 밴드 음악 활동은 아직 시기상조임을 깨달은 신중현은 다시 미 8군 연예단으로 돌아가서 악단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계속 한다. 그리고 1967년부터는 미 8군 연예단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 외에도 작곡과 음반 제작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7년에는 이정화, 이듬해인 1968년에는 펄시스터즈의 곡들을 만들어서 취입해줬다. 그러던 중 1968년 미8군 연예단의 월남 위문공연 계획이 잡혔는데 이 무렵 연초에 발표했던 펄시스터즈의 곡들이 예상치 못한 큰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중현은 월남 위문공연 참가를 취소하고 다시 미 8군 연예단을 나와서,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발굴하여 곡을 주고 프로듀싱까지 해서 데뷔를 시키는 음악 제작자로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후 신중현이 발굴하여 키운 가수와 곡이 하나같이 크게 히트해서 신중현 사단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이 '신중현 사단'의 유명한 가수로는 펄시스터즈, 이정화, 김추자, 박인수, 장현, 김정미 등이 있고, 유명곡으로는 '거짓말이야', '커피 한 잔', '꽃잎', '봄비', '봄','미련'등이 있다.
이 신중현 사단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 미친 영향과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히트도 히트지만, 각각의 음악적인 시도 자체도 상당히 새로웠다. 대중적인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해외에서 이제 막 태동하던 다양한 장르의 음악적 문법을 적극적으로 국내에 도입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 음악들이 하나같이 상당히 완성도가 높았다. 이 때부터 신중현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본격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해 나가게 된다.
일례로 1960년대에 그는 미국의 "솔 사운드"(소울 음악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소울 스타일의 한국 음악을 만들어냈고,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 록음악이 부흥하자,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또 한 번 소화해낸다. 게다가 서양의 신종 장르들을 국내에 빠르게 도입하기만 한 것 뿐 아니라, 서양의 오리지널들과는 구별되는 한국적인 독특한 정서를 담아서 재창조해내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가지만, 사실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도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의 곡이다. 잘 들어보면, 퍼즈톤의 기타와 스트레이트한 비트가 영락없는 사이키델릭이다.
신중현의 프로듀싱과 작사작곡 능력은 비단 '신중현 사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중현은 자신의 소속 가수 외에도 다양한 가수들에게 곡을 주어 히트를 시켰고, 또 프로듀싱을 하여 데뷔시키기도 했는데, 일례로 '안녕하세요'로 인기를 끌었던 장미화에게도 곡을 주었고. 김추자 이전에 김상희 음반도 만들었다. 윤수일과 함중아가 몸담은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도 신중현이 제작했다. 이문세의 2집 전체도 신중현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훗날 김완선이 1989년에 불러서 히트한 '리듬 속의 그 춤을'도 신중현의 곡이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기성 작곡자나 가수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음악의 흡수에 다소 인색한 반면, 신중현은 당대에 유행하던 새로운 음악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당대에 아주 트렌디한 음악을 했다는 얘기.
■ 탄압과 시련
그러나 3공 시절 청와대에서 신중현에게 박정희 찬양가를 만들라고 강권을 하나 신중현은 거절한다. 그 뒤 공화당에서 만약 박정희 찬양곡을 만들지 않으면 다칠지 모른다며 협박했으나 신중현은 또다시 거절한다. 신중현의 증언에 따르면, 1972년, 유신 독재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어느 날, 청와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들어보니 한마디로 '박정희 찬가'를 불러달라고 하길래 '난 그런 노래는 쓸 줄도 모를 뿐더러, 왜 하필 나한테 그런 주문을 하느냐'고 반문했더니, 그 때부터 일이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 박정희 정권에 완전히 찍힌 신중현은 많은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는 고난을 겪었고, 방송출연 금지 및 업소출연마저 막히게 된다.# 박정희 찬양곡 요구를 거절한 이후 얼마 후에 발표한 곡이 그 유명한 '아름다운 강산'이다. 이 노래는 처음에 "신중현과 더 멘"의 곡으로 박광수가 보컬리스트로 있을 때 처음 녹음되었다(1972년).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파동 이후 '아름다운 강산'은 한동안 본 의미와는 한참 다른 건전가요로 소개되었다. 후에 이선희가 커버해 유명해진 곡이기도 하다. 원래 10월 유신 체제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큰 탄압은 없었다고 한다. 검열은 그 이전 시대에도 존재했지만 한국은 서브컬쳐나 반문화가 대대적으로 퍼지기에는 생각보다 보수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반체제 뮤지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점점 록 음악의 붐이 불기 시작하고, 포크 음악이 서서히 밀려옴에 따라 관계 당국이 허용하는 수위를 넘는 음악이 자꾸 등장하기 시작한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는데 아직 한국은 소프트웨어적으로나 하드웨어적으로나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1960년대부터 급속히 활발해진 한미간의 교류로 당시 한국인의 이민자 수와 유학자 수가 연간 수만 명에 이루게 되고, 1970년대를 지나면서 연간 수십만 명으로 확대되는 나름 개방적인 시대였다. 1940~50년대에 이민을 간 한인들이 자신 혹은 그 자식 세대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반이민 혹은 일시귀국 형태가 굉장한 규모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 히피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한대수였다.
1971년쯤 되면 한국에서도 우드스탁 같은 페스티벌이 열리기 시작한다. 청평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것인데, 이로 인해 한국의 음악은 진일보하게 된다. 하드 록 밴드가 나이트 클럽에 등장하고, 소울 음악이나 훵크음악의 영향으로 소위 말하는 "브라스 밴드"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우디 거스리나 밥 딜런, 조안 바에즈를 추종하는 일군의 포크 음악 세력도 등장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머리를 기르고 대마초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국제정세로 인해 정부에서는 국가가 다시 권위주의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국가 총력전에서 이탈할 소지가 큰 이러한 청년 문화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의 모토 중 하나였던 "건전한 민족문화 창달"은 이러한 '서양에서 유입된 환락적인' 문화를 제거 대상으로 여겼다.
박정희 정권은 신중현에게 탄압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갔다. 탄압에 대한 가장 최초의 발단은 앞서 말했듯 박정희의 작곡 요구를 거절했다가 미운털이 박힌 것이 시작이었다. 물론 당시에 신중현은 그냥 별 생각 없이 거절한 것이었다고 한다. 딱히 하기 싫다기 보다는 별로 생각해본 적도 없고 해볼 생각도 없던 테마의 곡을 주문한 것이기 때문에 안 할란다에 가까운 입장이었던 것 같다. 애초부터 파격적이고 새로운 음악을 지속적으로 도입하고 실험했던 신중현에게 검열 당국은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1971년경 신중현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신중현이 시도한 다양한 기획이 실패한 것도 있었고, 음반을 내는 족족 검열에 걸려서 발매가 금지되는 등 사업을 펼치기에 너무나도 악재가 끊이지 않아 사실상 파산 상태에 빠진다. 게다가 이 시기, 신중현은 더더욱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록 음악의 작업에 몰두한다. 음악의 소재도 민중(아름다운 강산), 마리화나(잔디) 등 그 스펙트럼이 넓어지게 된다. 음악적으로는 후대에 훌륭한 곡을 남긴 시기가 되었지만, 음악 자체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하지만 신중현은 여전히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김추자를 비롯한 뮤지션들과의 작업으로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건재한 상황이었다. 이때 신중현은 다시 한 번 밴드로 대중 앞에 나설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생각으로 만들게 된 밴드가 바로 레전드급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이었다. 베이스에 이남이, 드럼에 권용남을 기용한 수퍼 세션 밴드가 탄생한 것이다. 신중현과 엽전들은 등장하자마자 1집 수록곡 "미인"을 대 히트시키며 1974년부터 1975년 중반까지의 1년을 강타한다.[25] 심지어 "미인"은 영화화 되어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음악영화로 개봉하게 된다. 당시 영화의 일부 영상. 지금봐도 드럼 비트가 보통 그루브한 게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기가 바로 10월 유신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애초부터 미운털이 박혀 있던지라 신중현과 엽전들은 당국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음반 수록곡이 금지곡에 묶여 방송이고 음반 판매고 모조리 막혀버린다(1975년 7월 12일). 비록 1975년 상반기를 강타했을지언정 그 다음이 막막한 상황이 된 것. 그렇게 음반이 규제당하는가 싶더니 지상파 방송에서도 복장 불량 및 퇴폐를 이유로 신중현에게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출연을 금지시키겠다"라는 통보가 날아온다. 그래서 신중현은 아예 1975년 10월에 발매한 신중현과 엽전들 2집에서는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앨범 커버에 등장한다. 노래도 죄다 행진곡이나 군가풍의 노래로 채웠고 이게 신중현의 곡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충격과 공포의 2집 재킷을 볼 수 있는 곳. 쉽게 말하면 이 시기는 신중현이 아예 대놓고 대항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어김없이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도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행진곡에 군가풍의 노래를 발매했는데도 금지곡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이 음반의 의도와 당국의 시각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상황을 베이스 이남이가 생전 인터뷰에서 자켓사진에 대해서 "지금 왜놈들 다스리던 시대도 아니고 왜 억압하고 난리냐"라는 뜻으로 항의하는 의미에서 찍은 것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결국 신중현은 1975년 12월 5일,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시 신중현은 대마초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중현의 이야기에 따르면 60년대 후반에 대마초를 경험해 본 바가 있고, 이에 따라 당시 주간지 선데이 서울에 "신중현의 해피 스모크 탐방기"라는 글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대마초 흡연 혐의로 관계 당국에 불려가서 간단히 조사를 받고 약식기소가 되어 사건이 종결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무리하게 후에 개정된 마약 관련법으로 법 조항을 소급 적용하여 잡아넣은 것,
이로 인해 신중현은 약 4개월간 감옥에서 썩게 된다. 신중현의 장남 신대철의 증언에 따르면, 신중현은 그때 정보부에 끌려가서 물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과 더불어 연예인 협회에서 제명당한다. 당시에는 완전한 국가 통제하의 사회였기 때문에, 연예인 협회에 등록하지 않으면 아예 활동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야간에 나이트 클럽에서 공연하는 밴드들도 모두 관계 당국에 등록되어서 '무슨 공연을 하는지 관계 당국이 알고 있는' 나라였다. 등록이 취소되면 '비등록 밴드' 취급을 받게 되어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하던 시대였다.
1978년 초, 신중현은 클럽 무대 출연 정도는 가능하도록 당국에 의해 다소 구제를 받았지만, 그 외의 음반 활동이나 방송 활동은 일절 할 수가 없었다. 10.26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이 올 때까지 긴 침묵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함께 활동 금지 조치를 받았던 다른 대다수의 가수들이 몇 개월 만에 곧바로 활동 금지 해제를 받았지만, 박정희가 죽은 10.26이 일어날 때까지 끝까지 오랫동안 전면적인 활동금지 조치가 풀리지 않았던 가수는 신중현과 조용필 단 두 명 뿐이었다.
■ 복권과 재기
하여튼 여러 대표작이 1987년까지 방송 금지곡으로 묶여버리는 등 상당한 수난을 겪으면서 고생고생하면서 음악 생활을 하였지만, 신군부 집권 뒤 방송 금지 조치가 풀린 후에는 대세가 디스코와 댄스 음악으로 바뀌어 본격 록 뮤지션으로서는 재기를 할 수 없었다. 대신 1980년 여성보컬 2명과 브라스를 포함한 9인조의 빅밴드인 "신중현과 뮤직파워"로 다시 등장해서 본인의 히트곡에 디스코 리듬을 가미해서 편곡한 독특한 앨범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2집에서는 신중현 본연의 실험적인 록사운드로 변모한 2집을 발표한다. 그 후 1983년 "신중현과 세 나그네"라는 본격 록밴드로 다시 등장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이 시기 이후 신중현은 작곡가로서만 활동을 하게 된다.[28] 90년대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일부 음악인들과 평론가, 애호가 중심의 재평가라 큰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 이후
2006년 12월 17일 은퇴 공연을 가졌다. 다만 방송 활동 은퇴이며 무대 은퇴가 아니다. 현재도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남긴 음악은 후배 음악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음악팬들에게도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10년에 록의 대부라는 명칭을 붙여 신중현을 헌정하는 CF가 나오기도 했다. 노래는 신중현의 명곡 미인이다.
2017년에 신중현 데뷔 60주년을 맞아 후배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존경을 표하는 트리뷰트 무대가 KBS 2TV '불후의 명곡'을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 그 외의 이야기들
앨범 <신중현과 엽전들>이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대중음악 100대명반에 선정되었다.
대중음악 전문지 '대중음악 사운드(SOUND)' 3호에서 최고의 작곡가 10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 가족관계
가족 관계로는 부인과 아들 셋이 있는데, 가족들 모두 음악인이다. 부인인 명정 강씨는 60년대 초반,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9인조 여성 재즈 밴드인 '블루 리본' 출신으로서 한국 최초의 여성 드러머였다.
맏아들인 신대철은 거의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그룹인 시나위의 리더이자 세션 등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도 다수 하였다. 최근에는 2012년의 나는 가수다 2 출연을 계기로 시나위 미니 앨범을 내고 활동하다가 시나위 정규 10집을 준비하고 있다. 둘째인 신윤철은 원더버드 시절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리다 현재 막내인 신석철과 함께 서울전자음악단을 결성해 함께 활동하다가, 현재는 다른 멤버들을 구해서 서울전자음악단을 이끌고 있으며, 여러 프로젝트성 그룹을 결성하고 음악을 하는 중. 신석철 또한 최근 서울전자음악단 탈퇴 이후 여러 뮤지션의 드럼 세션 활동과 그루브 올스타즈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2년 말에는 신윤철과 신석철 그리고 송홍섭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인 카도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일반적인 뮤지션이나 연예인들이 본인이 성공한 경우에도, 자기 자식들이 음악을 하거나 연기를 하거나 하려할때 말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 달리, 신중현은 아들들이 모두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따로 엄청난 지원 같은 건 하지 않았어도) 반대를 전혀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 어린 시절의 신대철과 신윤철에게 직접 기타를 가르쳐 준 사람이 신중현이었다. 신대철의 말에 의하면, 신중현은 손자들도 음악을 하길 은근히 바란다고 하며, 신대철 본인도 자식이 의지와 소질이 있으면 시킬 마음이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가족들 모두가 굉장히 과묵한 편으로 인터뷰라도 할라 치면 굉장히 느린 말투와 열박자 쉰 다음에 나오는 '...네... ''''아니오...' 정도의 단답형 대답만 하는지라 인터뷰어가 인터뷰를 진행하기가 굉장히 힘든 편이다. 김창완이나 배철수 같은 레전드급 뮤지션들이 3형제를 인터뷰하면서 굉장히 진땀 빼는 편. 말수가 없는 신대철이 형제 중에 가장 달변가에 수다스러운 편이라고 하니...
신해철은 신중현의 아들이 아니다. 단지 신중현의 3남들처럼 평산 신씨 34세손 '澈' 항렬자를 쓸 뿐이다. 그러나 이름이 비슷한 인연으로 신대철이 신해철과도 친형제처럼 생각하여 친분을 유지하면서 지낸다는 말은 한 적이 있고, 실제로 신해철 본인도 신중현의 아들로 오해받은 해프닝을 방송에서 이야기한 적도 있다. PD가 뜬금없이 "아버지 잘 계시냐"라고 물어보고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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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행복하다 - 김도향 (0) | 2022.03.15 |
슬퍼하지마 - 김종환 (0) | 2022.03.15 |
스카브로우의 추억 - 뚜아에무아 (이필원, 박인희) (0) | 2022.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