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그대 없이는 못살아 - 패티김

청가헌 (聽可軒) 2022. 5. 20. 09:19

그대 없이는 못살아 / 패티김

 

(1) 좋아해, 좋아해 당신을 좋아해

저 하늘에 태양이 돌고 있는 한 당신을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당신을 좋아해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 한 당신을 좋아해

그대 없이는 못살아 나 혼자서는 못살아

헤어져서는 못살아 떠나가면 못살아

 

(2) 사모해, 사모해 당신을 사모해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당신을 사모해

사모해, 사모해 당신을 사모해

장미꽃이 비오기를 기다리듯이 당신을 사모해

그대 없이는 못살아 나 혼자서는 못살아

헤어져서는 못살아 떠나가면 못살아

 

(3) 사랑해,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이 생명 이 마음을 다 받쳐서 당신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영원히, 영원히 변함이 없이 당신을 사랑해

그대 없이는 못살아 나 혼자서는 못살아

헤어져서는 못살아 떠나가면 못살아

 

그 대없이는 못살아 나 혼자서는 못살아

헤어져서는 못살아 떠나가면 못살아

나 혼자선 못살아 떠나가면 못살아

아 아 아 아

 

  • 본명    김혜자 (金惠子)
  • 출생    1938년 2월 28일 서울특별시)
  • 배우자  길옥윤 (1966 - 1973)

                아르만도 게디니 (1976 - )

  • 자녀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1969년생)

              카밀라 게디니(1978 12 30일생)

  • 학력    중앙여자고등학교 (졸업)
  • 종교    개신교(침례회)
  • 신체    168cm
  • 데뷔    1958년 미 8군 무대

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전설적인 디바로, 한국 현대 대중가요사에서 숱한 '최초' '최고'의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스탠다드 팝의 선구자, 이미자, 현미, 이금희, 한명숙, 최희준, 윤복희와 더불어 1960년대를 대표하는 명가수이자 디너쇼의 여왕.

2. 활동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여 데뷔하였고, 2년 후 1958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예명은 '린다 김' 이었는데 미국의 여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현재의 예명으로 바꾸었다. 패티김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스타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가는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해방 후 일본시장에 처음 진출한 것을 비롯해[7] 한국가수 두 번째 미국시장 진출[8], 한국 여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 홀 공연, 한국 가수 최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등 사실상 현재 한국 가수들이 이뤄 낸 해외 커리어를 모두 시도한 가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시도에 의의가 있고, 본인도 자서전에서 밝혔듯 크게 고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동양여성으로서 홀로 미국시장에 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2013, 긴 가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녀는 여러 곡의 히트곡을 냈고 누가 뭐래도 한 시대를 지배했던 대형 여성 가수였다.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서울의 찬가,그대 없이는 못 살아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2-1 이미자와의 라이벌 관계

가수 이미자하고는 라이벌 관계로서 함께 묶여 언급된다. 데뷔시기도 같은데다가 나이대도 비슷하고, 음악스타일 역시 이미자가 트로트의 여왕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강한 노래를 주로 불러왔다면 패티김은 스탠다드 팝 위주의 세련되고 서구적인 정서가 다분한 노래를 주로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교되었다. 또한 대중성 측면에서도 이미자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의 가수였다면 패티김은 세련되고 도시적인 분위기로 완전히 상반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언론이나 대중이나 둘을 항상 라이벌 관계로 묶어 자주 비교했다.

 

실제로도 서로 신경전이 치열했던 걸로 유명했다. 작곡가 임석호가 방송에서 밝히기를 패티김을 영입하고 싶어했던 이미자의 소속 음반사 회장이 "우리와 계약하면 이미자와 같은 급으로 대우 해주겠다"고 직접 스카웃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패티김 측에서 "최고의 대우도 아니고 이미자와 동급 대우가 말이 되냐" 라며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계약이 불발되었다. 그 외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로 방송국 측에서 패티김과 이미자를 동시에 섭외하려고 했었는데, 어느 한 쪽의 출연 순서가 뒤로 밀리면 캐스팅을 거부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1순위로 써진 큐시트를 두 가수에게 보냄으로서 겨우 캐스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먼저 도착한 가수가 리허설을 빨리 끝내고 무대에 먼저 올라가자 '나 일 있어서 무대 안 올라간다' 며 그냥 노래를 안 부르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나이가 든 뒤엔 함께 토크쇼에도 나오고 덕담도 해주는 등 디바기질이 많이 가라 앉기는 했다. 2010년에는 고인이 된 박춘석 작곡가의 추모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는데 "나는 대중가수지만 이미자는 국민가수다. 나랑 비교하기 힘들다." 라고 세간의 불화를 일축시킨 바 있다. 또 패티김 본인의 은퇴 당시 인터뷰에서는 "우리는 같은 가요계를 걸어온 동반자일 뿐, 라이벌로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라며 일축한 바 있다.

3. 가족

원래 길옥윤과 1966년에 결혼했으나 1973년에 이혼했고, 1976년 이탈리아 사람인 아르만도 게디니(Armando Ghedini)와 재혼했다. 아르만도 게디니와는 백년해로 중이다.

 

슬하에 2녀가 있지만 큰딸 최정아(1969~)는 전 남편 길옥윤의 딸이고 둘째딸 카밀라 게디니(Camila Ghedini, 1978 12 30~)는 패티김이 이탈리아인인 현재의 남편인 아르만도 게디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패티김 이탈리아'라는 자동 검색어까지 있다.

 

그런데 장녀 최정아도 미국 백인 사위 윌리엄스와 결혼하는 바람에, 패티김의 후손은 장녀 최정아를 제외하고 전원 백인 혼혈이 되었다.

패티김 부부
차녀 카밀라 게디니

차녀 카밀라 게디니는 이탈리아 혼혈로 빼어난 미인에 키까지 커서(171cm) 모델을 연상하게 하는 외모를 지녔다. 2003년에 가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당시 가수 패티김의 딸이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으며, 데뷔하기 전에 팬클럽이 형성되는 등 반응이 좋았다. 데뷔앨범 역시 당시 유명했던 유정연[15], 업타운의 정연준, 러브홀릭의 강현민 등 유명 프로듀서진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서와 맞지 않는 한국 연예계의 시스템과 문화를 많이 어려워 했고, 자신의 음악 지향점과 맞지 않는 장르를 강요받는 등 한국에서의 음악 활동을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1집을 이후로 가수활동을 접어 버린다.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웨딩플래너로 전직한 후 정착해서 살고 있다.

왼쪽부터 장녀 최정아, 남편 아르만도 게디니, 차녀 카밀라 게디니.

최정아와 카밀라는 아버지가 다른 이부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친자매 이상으로 좋은 우애를 과시하고 있으며, 최정아는 새아버지 아르만도에게 새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어린 효도를 다하고 있다.

5. 기타

  • 지금봐도 굉장히 이국적인 외모로 당시에도 화제였다고 한다. 어딜 지나다니면 혼혈이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고. 키도 168cm로 지금 기준으로도 큰 키인데 그 시절에는 정말 엄청난 장신이었을 것이다. 이런 탈동양인적 외형이 당시 미8군 클럽에서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체구가 작은 동양여성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외형 덕분에 주목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런 부분을 뿌듯하게 생각했다.
  • 이국적인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 때문에 많은 루머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누드집을 찍고 왔다' 는 루머를 비롯해서 성형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 말에 따르면 "미8군 공연 시절 쌍꺼풀 수술과 코 수술은 받은 적은 있지만 이전의 개성을 잃어버리는 듯해 코에 넣었던 보형물을 오히려 제거했고 그 외에는 얼굴에 손 한 번 댄 적이 없었다" 며 성형루머를 정면으로 부인한 바 있다.[18] 실제로 젊은 시절과 현재 모습을 보면 쌍꺼풀과 젖살이 빠진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
  • 노래하는 패티김의 발음을 들어 보면 서울 출신인데도 요즘 서울 말씨와 억양과 발음이 좀 달라 북한 사람들 말투 비슷한데, 이것이 당시의 서울 사투리이다.
  •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광팬으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한 번은 자신의 딸에게 "내가 마이클 잭슨이 너무 보고싶은데 그 분 집 앞에 가서 꽃이라도 놓고 가면 안 될까?" 라고 말하자 "엄마. 마이클 잭슨이 무슨 옆집 이웃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팬이 만나고 싶다고 무작정 만나주는 게 어딨냐." 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 휘트니 휴스턴 역시 가장 좋아했던 아티스트로 내한 당시 콘서트를 갈 정도로 팬이라고 한다. 원래 자신에게 초대권이 왔었는데 일부러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직접 제일 앞자리를 예매해서 봤다고. 당시 휘트니 휴스턴이 왠 백발의 여성이 자신의 노래에 열광하며 따라부르는 게 신기해서 직접 객석으로 다가가 인사도 나눴는데, 객석에서 패티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들 놀래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 굉장히 자기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이미 칠순이 훨씬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운동과 목관리로 전성기때 컨디션을 유지해 왔다. 매일매일 5km씩 걷기 운동과 요가를 비롯해 수영 1500m를 한다고. 식이요법도 철저해서 데뷔 후 배불리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은퇴 기자회견 때는 7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몸매와 패션감각으로 화제가 되었다.
  • 절친으로 잘 알려진 연예인은 조영남. 사석에선 아예 누이, 동생라고 일컬는 사이이다. 패티김이 은퇴 당시 자서전을 쓸 때 직접 내용을 다듬고 책을 써줬을 정도였다.[23] 자서전에서는 '누나는 왜 그리 띨띨하냐' 고 농담섞인 디스를 할 만큼 친하다. 애초에 미8군 시절부터 같이 공연을 뛰던 사이이고, 연예계에 진출한 뒤로도 쭉 죽마고우 하던 사이였기 때문에 안 친한 게 이상할 사이이기는 하다. 고 쟈니 윤과도 함께 친했나 보다. 조영남이 같이 쟈니윤쇼를 할 때, 자니윤이 튀김이-(패)튀김, (조)영남이, 자신을 (쟈)니윤이, 앞글자만 해서 조.패.자(존나게 패자) 삼인조 라고 섹드립 섞어 부른 일이 있다.
  • 무대욕심이 엄청나서 원래 방송국측에서 배정된 예산에 직접 사비를 들여서 무대를 꾸미는 걸로 유명했다. 방송인 이상벽이 밝히기를 일반적인 가수에게 배정된 출연료가 200만원이면 '난 500만원 주세요. 난 패티김이니까' 라며 출연료를 협상했고, 요구가 거두어지면 자신의 사비를 더 보태서 무대 연주 세션도 훨씬 고급으로 채우고 연출도 훨씬 신경써서 꾸몄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공연장에서는 화장실에서 팬과 만날까봐 대기실에서 요강을 쓰고, 무대 위에서는 배에서 소리가 날까봐 아예 가슴 아래로는 마이크도 안 댈 정도로 철저히 무대에 임하는 걸로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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