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서울 서울 서울 - 조용필

청가헌 (聽可軒) 2022. 7. 6. 19:29

서울 서울 서울 / 조용필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 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추억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

그 언제쯤 나를 볼까

마음이 서두네

나의 사랑을 가져가 버린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오 오 오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이별을 알면서

도사랑에 빠지고

차 한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눈물 속에서

멀어져 가는 그대여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오 오 오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오 오 오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 출생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
  • 본관      임천 조씨
  • 신체      165cm, 56kg, O형
  • 가족      배우자 안진현(1950년 ~ 2003년)
  • 학력      송산초등학교 (졸업)

                 송산중학교 (전학)[5]

                경동중학교 (졸업)

                경동고등학교 (졸업)

  • 종교       불교
  • 장르       팝 록, 프로그레시브 록, 뉴웨이브, 신스팝,

                   트로트, 얼터너티브 록, 전자음악, Funk, 하드 록,

                   R&B, 퓨전 재즈, 사이키델릭 록, 오페라,

                  펑크 록, 민요, 동요, 가곡

  • 별명       가왕, 작은거인, 풀빵, 조방범
  • 취미       골프

 인물 소개

1950 3 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태생이다. 경동고등학교[7] 1969 25회 졸업생이다.[8]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9], 1979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데뷔 50년동안 꾸준하게 현역가수로 활동하고 있고 아직도 거의 매년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중이다.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를 무려 7번이나 매진시켰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수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이자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전설급의 자타공인 타종불허 가요계의 제왕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슈스케에서 김태우가 이승철을 가왕이라고 호칭하자 이승철  "그건 용필이 형이지."라면서 스스로 부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최정상급 가수들도 조용필은 소위 '논외'로 해둘만큼 치켜세울까? 그저 선배라서? 선배 가수가 한둘이 아닐텐데? 아래 영상을 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조용필은 저런 멘트를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2011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15]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16]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

 경력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 이후 1968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 5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72 "그룹 25"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 응원가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조용필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시절의 수많은 음악적 시도의 성공 덕에 대중성과 다양성을 오랜 기간 동안 잡아낸 보기 드문 가수이기 때문. 조선일보의 대한민국의 최고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이미자, 3위는 나훈아, 4위는 서태지가 되었다. 조용필이 2위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더불어, 방송국이 굽혀주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로 가요계 배분과 위상이 높은 점에 기인한다. 보통 PD들이 가수를 지칭할 때 '~'라는 호칭으로 큐시트를 주는데 조용필은 방송국에 떴다 하면 최고위급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사실 조용필만 선생님이라 불리는 건 아니고 이 정도 연배의 배우나 가수들은 모두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패티 김이 방송국에 떴는데 패티 김 씨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실제로, 2013년 각 방송국 예능국장급은 다 조용필과 같은 시대 인물이거나 그 아랫세대다. 이승철이 회상하기로는, 자신의 신인 시절은 PD들의 힘이 워낙 세던 때라 어린 가수들이 지각을 하거나 하면 '저기 가서 손 들고 서 있어!' 라고 윽박지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임에도 조용필이 오면 반드시 국장급 이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이승철의 신인 시절이면 조용필이 중견가수긴 해도 30대 후반일텐데 이미 그 때도 엄청났다는 얘기가 된다. 국내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가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가수이기도 하다. 80년대는 음악 평론이란 것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조용필의 크로스오버적인 실험들이 90년대 중반 들어서야 겨우 조금씩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단독 공연으로는 2003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콘서트를 하였으며, 자신의 데뷔 00주년 공연 중 마지막으로 게스트를 초청한 35주년 콘서트에는 신승훈, 신해철, god, 이은미, 장나라, 유열이 출연하였다.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그 중 2003, 2005, 2018년 공연은 우천 속에서도 매진된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이후 잠실 공연에 도전한 이승환도 우천을 만나며 객석이 비게 되었고, 이후 이문세, 싸이 등도 도전했지만 잠실 주경기장은 쉽사리 만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필은 괜히 가왕이 아니다. 또한 1999년 말 대중가수 중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였으며 향후 몇 년간 연말 투어로 그곳에서 마무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국내 공연문화(콘서트)에 있어서도 선구자이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계속 이끌어오고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해외 아티스트들도 아무나 시도하지 못하는 무빙스테이지를 2010년 국내에 도입했다. 너비 120m, 높이 33m의 초대형 무대는 잠실 주경기장을 80m나 움직였다.  2010 Love in Love 콘서트때 이틀간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8 50주년 콘서트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규모, 조명, 폭죽 모든 게 넘사벽이다. 모든 활동은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같이 하고 있는데 그의 위상과 걸맞는, 대한민국에서는 전설급이라 할 수 있는 세션들만 거쳐갔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민, 송홍섭, 정원영,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이 있다.

2018 4 1일과 3일 평양에서 공연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에도 합류했고, 1차 공연에선 출연자 중 가장 많은 4곡을 불렀다.

 창법/예술력

한창 활동할 당시엔 노래부터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이었다. 사운드, 공연 퀄리티도 당시 기준으론 압도적이었다.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쓱싹 써낸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 창법의 경우 현시대의 (믹스보이스적인) 발성과 창법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창법에 우위 논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거고 발성이나 창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 못하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조용필을 성대모사하는 연예인들이 웃음을 목적으로 과장되게 따라해서 그렇지, 조용필의 가창력은 최정상의 실력이다. 심지어 50주년 콘서트에서 2시간 내내 20여 곡을 라이브로 소화했을만큼 그의 목 내구도는 수준급이다. 원래 데뷔 초기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 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의 음악도 참고하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듣기 불편할 수도 있으나, 그게 조용필만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청중도 있으니 아이러니. 애초에 대중창법에 정답은 없다. 한편으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상당히 두터운 탁성을 구사한 바도 있는데 이때의 가창스타일이 조용필 커리어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스러운 창법을 활용하는데, 특유의 개성있는 톤과 어울려 댐핑감을 선사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 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 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 , 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 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 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 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펑키하거나 재즈풍 리듬의 곡(10-I Love you/모나리자, 12-내 모습, 13-어젯밤 꿈속에서, 14-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13-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웍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다만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 차이가 분명히 있기는 한데, 이는 더블링[48]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에 라이브를 할 때도 원래 가진 소리 자체는 가는 음색이었으나, 앨범에서 들리는 소리는 약간 굵게 들린다. 다만 라이브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노래할 때 성량 자체가 상당히 커서 어느정도 커버된다고 한다.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본인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가늘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 데에 있어서 초고수다.[49]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50] 다만 초기에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은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미8군 시절 대세가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창법이 노래 잘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1980년대 음반 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 레코드 사와의 갈등 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51]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못한 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 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것만 믿고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득음을 하기 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52] 재능과 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록 음악(미지의 세계), (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재즈(단발머리), 일렉트로니카(아하! 그렇지),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Rap까지 섭렵했다.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60대의 나이라는 말에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 Imagine Dragons와 같은 음악도 즐겨 듣고[56]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또한 진짜 립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가수 중 조용필을 언급했다는 데서 그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게 된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다.

 여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981년에 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로맨스 영화[57]에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 다른 포스터 이 영화는 이후로 묻혀져서 그야말로 보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다가 2009년에 팬들이 소규모 재상영을 가졌다. 그래도 한국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보관하고 있어 이따금 틀어주기도 한다. 근래 상영은 2017 10 18일과 20일로 되어있다.#

트로트 가수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원래 락 밴드로 시작했고 지금도 본인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이다. 포지션은 리드 기타는 아니고 세컨드, 리듬 기타이다. 반 세기를 해 온 만큼 기타 실력 또한 뛰어나며, 2000년대 이후에는 기타라스트임을 강조하지 않고 있지만, 기타 연주(특히 전기 기타) 잘 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던 80-90년대 앨범이나 위대한 탄생 공연 포스터에는 대부분 기타를 들고 있다. 물론 현재도 공연 중에 자주 기타를 든다.

조용필의 노래 허공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래며 이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혜수가 출연했다.

1988 MBC 대학가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 때 신해철이 속해있던 무한궤도의 곡 '그대에게'의 강렬한 전주에 꽂혀 바로 대상감으로 점찍었는데 실제로 무한궤도가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대에게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그대에게'의 전주는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신해철의 전략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왕에게 먹혔으니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용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서울 서울 서울'을 만들었으며 본인이 직접 88올림픽 D-100기념 축제에서 밝혔다. 다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곡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곡 자체는 주제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 구성되어있다.

한때 일본에서도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1990년대 초, 한류라는 단어조차 형성이 안 됐을 때, 이미 조용필은 일본인에게도 잘 알려진 한국의 가수였다. 엔카, 록 음악, 발라드 등의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엔카 가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いで迷子(오모이데마이고, 추억의 미아)'[60]는 전국적으로 대히트, 일본 내에서 100만장 이상을 판 플래티넘이 되었다. 1994년 기준으로 일본 내 조용필의 음반 누적 판매량은 공식적으로 600만장, 비공식적으로는 800만장이라고 하나, 이는 과장된 면이 많다.

우선 조용필의 일본 내 최대 히트곡인 'いで迷子' 1986년에 발표된 후 1987~1988년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은 히트곡은 맞다. 오리콘 주간 최고 순위는 13위이지만 1988년까지 꾸준히 팔려 1988년 오리콘 싱글 연간 차트 35위를 차지하였다.[61] 그러나 100만 장이 팔렸다는 것은 과장이 심하게 들어간 것이다. 일단 1988년 연간 차트에서 'いで迷子'가 기록한 판매량은 21.8만 장이다. 그런데 'いで迷子' 1986~1987년 연간 차트에는 못 들어갔고, 1986, 1987년 연간 차트의 50위 작품 판매량은 19.3만 장과 15.3만 장이다.  'いで迷子' 1986~1987년에 연간 50위권에 아슬아슬하게 못 들어갔다고 가정해도 총 판매량이 19.3+15.3+21.8=56.4만 장을 넘을 수가 없다. 최대 히트곡인 'いで迷子'가 이 정도고, 또다른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 26만 장 정도가 팔렸다고 하니, 조용필의 총 음반 판매량이 600만 장을 넘었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조용필의 소속사 측이 일본 내 인기를 과장/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본에서의 음반 판매 기록으로는 김연자가 더 많이 팔았다. 1980년대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잘 알려진 남성 트로트 장르 가요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는데, 조용필 이후 일본에서의 인지도 1위 남성 트로트 가요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김정구 사후 '눈물 젖은 두만강'이 점점 잊혀 가고 있는 데 비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아직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 그 외에 조용필은 'いで迷子' 외에도 '夢夜舟(꿈의 밤배)', '共犯者(사랑의 공범자)', '落葉(붉은 낙엽)', 'しみのゆくえ(슬픔의 행방)' 등의 여러 곡을 발표했다.

다만 일본 활동 당시 판매량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을 대표하는 인기 가수로서 사실상 국가대표급 대우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한국 쪽의 푸시도 엄청났는데, 당시 일본 인기 엔카 가수들을 한국에 초청해 합동 공연을 열기도 했고 한국 지상파에도 나왔다. 그리고 인기 엔카 가수들이라고 보기도 무리도 많은게 가장 친했던 다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나카지마 미유키와 같은 장르를 하는 뮤지션이다. 본의 아니게 엔카 느낌의 노래를 만들기는 했지만, 본질은 사다 마사시와 나카지마 미유키처럼 포크 가수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당시 일본 가수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라 임팩트가 컸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임팩트가 컸는지 반대로 일본 문화가 다시 한국을 파고든다며 이를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필이 초청한 일본 가수들과 친분이 있는 일본 가수들은 일본 내에서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고 또한 추억의 가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절친인 다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いい日旅立(좋은 날의 여행)', '(묘성)'과 같은 세기의 명곡들을 남겼으며, 특히 'いい日旅立'는 불세출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꼽히며[62], 그 작사 작곡을 맡은 게 다름아닌 다니무라 신지였었고 또한 조용필도 'いい日旅立'를 불렀다. 또한 호리우치 타카오, 모리 신이치, 후세 아키라[63] 등과도 친했으며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가창력을 보인 가수들이었다. 그로 인해 조용필을 좋아하는 노인들 중에서 조용필로 인하여 일본 노래를 접한 사람들도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도 한류가수들의 인기의 척도로 종종 거론되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1987~1990)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최후의 출연이던 1990년 같은 경우 서울 롯데월드 현지 중계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부른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참고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 기네스북에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외국 가수의 노래'로 등재되었으며( 30회 이상) 일본 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에 진출한 한국배우/한국가수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2002 20대를 겨냥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 허나 직후 욘사마가 센세이션하게 뜨고 이후엔 K팝이 일본을 강타하면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천재라고 불리는 비운의 가수 유재하의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 음반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당시 새파란 20대의 청년이던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너 곡 좀 써봐라라고 이야기 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유재하가 참여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혼자서 있는 곡 다 가져다줬는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어서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겨울을 나갔다고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밝혔다. 이때 김현식에게 가져다준 곡은 명곡인 '가리워진 길'이다.  10곡은 이후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이자 그의 유작 음반이 된다.

조용필은 대중문화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들이 보는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조차도 조용필의 '친구여'라는 노래가 나온다.[64] 그 노래를 들은 둘리는 감격하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눈물을 쏟는다.(...) 허나 이 곡을 마이콜이 부른다면?

1980년대 엄청난 인기 가수였지만 당시 연예인을 무시하던 사회풍조 탓에 황당한 시비도 많이 당했다.[65]1985년에는 카페에서 함께 술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91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KBO 리그 개막전에 초청되어 애국가를 열창하다가, 마지막의 '길이 보전하세' '우리나라 만세'로 잘못 부른 적이 있다. 본인은 '카메라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서'라고 해명했지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어쨌는지 이후 애국가를 부르는 초청 자리에는 가지 않고 있다.

1993년 해운대 콘서트에서 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나, 1992년 서태지의 등장과 더불어 "슬픈 베아트리체", "고독한 러너" 등이 실린 14집과 "남겨진 자의 고독" 15집이 흥행 실패하며 일시적인 침체기에 돌입했었다. 조용필 본인도 신해철의 음악도시에 출연해 이 시기를 가장 아쉬운 시기로 언급하기도 했다. 94년 안진현과 재혼 및 전담 밴드인 위대한 탄생과 재결합하며 비로소 방송 활동을 재개하며 16 "바람의 노래"로 모처럼 대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후 1998년 올림픽공원에서 30주년 공연 콘서트 및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 공연이 흥행하며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1999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 공연(대중가수로는 처음)을 치르며 "가왕" 이미지를 굳혀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연말 마무리 콘서트장으로 삼았다.

2003년 데뷔 35주년 공연부터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즐겨(?) 개최하기 시작한다. 2005년에 북한 공연 이후 다시 잠실 공연을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 2003년과 2005년 모두 제대로 비를 만나는 바람에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스탠딩으로 물 반 땀 반 야광봉을 흔들었다. 조용필 본인도 05년 공연은 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중간에는 스스로 신난 나머지 "비 상관없지 않아요??" 드립을 시전하시다 "비가...... 조금 덜 오네요" 라고 민망해하며 수습하기도 하였다. (팬들에게는 이런 썰렁함이 매력이기도 하다.) 뒤로는 다행히도 비는 피했으나 2018 5 12 50주년 콘서트때 하루종일 비가 왔다.

2010 5 28~29일 열린 콘서트(Love In Love) 에서 잠실 주경기장에 1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60세의 나이에도 라이브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역시나 황제라는 것을 보여줬다. 관객들은 대부분이 4~50대였지만, 노래를 부를 때 열광하는 건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고 한다. 특히나 본 공연의 수익금은 소아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기부하여졌다는데, 그 액수만도 수십억원대라고 한다.

어쩌다보니 군가 진짜 사나이를 널리 알린(?) 가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에는 음반 발표시 꼭 건전가요(...)를 넣도록 되어있었는데, 7, 8, 9집에다가 건전가요로 진짜 사나이를 자신이 직접 불러넣어둔 것이다. 다만 재발매본에서는 빠져있다.

조용필 콘서트에 갔었던 아티 콘펠드의 말로는, 조용필의 우드스탁(미국 오리지널 말고 한국에서 개최된 우드스탁을 말한다)의 참가는 그의 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가수 가운데 이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 락의 대부인 신중현이나 조용필 스스로도 존경하는 가수라고 밝힌 패티 김 정도다.[69] 재미있는 사실은 패티 김은 자신에게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진정한 국민가수는 조용필과 이미자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연말 시상식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유는 알다시피 조용필의 독주 체제에 제동을 걸만한 가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 MBC의 가수왕자리를 계속 차지했는데, 예외적으로 MBC에서 1982년 이용, KBS에서 1984년에 김수철, 1986년에 전영록이 가수왕을 차지했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기도 했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였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자에게 골든컵을 준 다음 명예 졸업을 시키는 시스템은 조용필의 히트곡이 1위를 너무 독주해서 그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사실상 그 이유가 맞다고 봐야 한다. 골든컵이 처음 도입될 때는 5주가 아니라 10주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2011 4 15일엔 작년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소록도를 방문해 공연을 했다. 2009년 전남 고흥과 소록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위문차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진짜 다시 방문한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소규모 강당에서 즉석에서 요청곡을 받고 중간에는 무대에서 내려와 같이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노래를 부르는 등 주민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11 5 7일 서울 올림픽공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2개월간 전국 투어를 열었다. 이번에는 관객 앞으로 움직이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1년 올해의 콘서트 티켓 최다 판매 가수의 기록을 세웠다. 2위는 이승철인데 이승철이 29회 공연한 반면 조용필은 이에 절반인 14회 공연만으로 티켓 파워에서 앞섰다.

나는 조용필이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생각하면 MBC프로그램들과 인연(?)이 꽤 있는데 결국 2011 9 25일 나는 가수다에 특별출연했다.

2013 4 23일 정규 19 Hello의 발매가 확정되었다. 4 16일 선공개곡 'Bounce'가 발표되었는데 발표되자마자 음원차트 1위를 찍었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가수가 차트 1위를 탈환한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전무하다. 진짜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LP로 데뷔하여 카세트테이프와 CD를 거쳐 디지털 음원까지 석권한 가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음원 소비 연령대를 분석한 멜론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의 여타 히트곡과 비교해도 소비자층의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조용필의 히트곡을 듣고 자란 4~50대에 한정된 호응이 아닌, 음원 차트의 주요 소비자이면서 조용필을 잘 모르는 10~20대가 듣기에도 충분히 먹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인 셈. 말 그대로 국민가수다.

2013 4 23 19집 전곡을 발표하면서 쇼케이스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오프닝으로 국카스텐이 '모나리자'를 불렀고, 박정현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자우림은 ''을 열창하면서 가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특급 가수를 오프닝으로 세우는 가왕의 위엄을 볼 수 있다.

2013 5 3. 23년 전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로 23년 만에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으로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나이가 2013년 기준으로 63세라는 진갑을 넘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돌들이 강세를 보였던 가요프로에서 60대 최고령 가수로서는 최초로 1위를 차지하게 된 이례적인 사례다. 가요무대와 뮤직뱅크를 동시에 섭렵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가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부인 안진현과 함께 찍은 사진

조용필은 1984 3선 국회의원 박찬의 딸 박지숙과 결혼하지만 결혼기간의 갈등 끝에 4년만에 합의 이혼했다. 이혼 당시 대부분 재산을 양도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고 원만하게 이혼을 하여 별 추문 같은 게 없이 조용히 끝났다. 이후 그는 1994년 미국의 로비스트 출신인 안진현과 재혼했다. 안진현은 조용필의 음악적 삶을 존중하며 내조하고, 그는 이러한 아내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결혼 5년만에 심장병에 걸린 안진현은 2003 1월 투병 도중 사망하게 된다. 당시 안진현의 사망소식은 주요 언론매체에 의해 자세히 보도되었는데, 조용필은 장례를 치르는 내내 핼쑥한 모습으로 상주를 서다가 간간히 오열하는 모습 등을 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내의 사망 이후 조용필은 상속액 전액을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으며, 현재까지 수익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2003 18집에 수록된 노래 '()'은 바로 아내를 그리며 작곡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용필이 잠실운동장에서 처음 공연을 한 35주년 기념 콘서트날 공교롭게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데 조용필은 이 노래를 부르던 말미 잠시 울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허경영이 2004 10월엔 "가수 조용필의 부인인 안진현에게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면서 조용필을 상대로 50만달러의 매매대금 청구 소송을 냈다. 증인이 없으니 우기면 삥 좀 크게 뜯어낼 거라고 고인을 이용해서 이런 정신나간 소송을 했지만 어차피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어 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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