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가곡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 심수봉

청가헌 (聽可軒) 2022. 3. 14. 05:02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 심수봉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
눈 앞에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
뱃고동 소리도 울리지마세요
하루하루 바다만 바라보다
눈물 지으며 힘없이 돌아오네
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가 그렇게 다
아~~~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남자는 다 그래
*
매달리고 싶은 이별의 시간도
짧은 입맞춤으로 끝나면
잘가요 쓰린마음 아무도 몰라주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아주 가는 사람이 약속은 왜 해
눈 멀도록 바다만 지키게 하고
사랑했었단 말은 하지도 마세요
못 견디게 네가 좋다고
달콤하던 말 그대로 믿었나
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가 그렇게 다
아~~~

쓸쓸한 표정짓고 돌아서서 웃어버리는
남자는 다 그래

심수봉(沈守峰, 본명: 심민경(沈玟卿), 1955년 7월 11일 ~ )

■학력

서산국민학교 (전학)  서울은로국민학교

인화여자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생애

1. 가수 데뷔 이전

1950년 증조부, 조부, 백부, 숙부, 부친, 고모 등이 모두 유명한 음악인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피아노와 재즈음악을 연습하여 로큰롤을 주로 연주했던 보컬 그룹 <논스톱>의 드럼 주자로 미8군 부대 전용 클럽 무대에 섰다. 이 때 같은 그룹은 아니었지만 같은 부대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수희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워낙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여러 악기를 다루는데 능통하였으며 음악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여러 장소를 찾아갔었다.

 

당초 서산국민학교를 다녔으나,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은로국민학교로 전학을 간 후,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치료를 위해 또다시 2년 휴학을 했다. 훗날 인천 인화여자고등학교에 뒤늦게 입학하여, 1973년 졸업했다.

 

한편, 공식적으로는 195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신고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5살 줄여진 나이였다.

 

2. 가수 데뷔 이후

1976년 남산 도쿄호텔 23층 스카이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심수봉은 당대 최고의 가수이던 나훈아가 우연찮게 손님으로 들르자 서비스 겸 그의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를 즉석에서 라이브로 선물했다. 피아노를 치며 즉석에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심수봉을 본 나훈아는 바로 어딘가로 나가더니 곧바로 유명 음반사 사장 둘을 데려와서 "이 사람이 가수가 안 되면 누가 되나"라며 데뷔를 권유했다. 그리고 그의 주선으로 1976년 신세기 레코드와 50만원에 음반취입 계약을 맺고 녹음에 들어간다. 하지만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음반발매가 취소되었고 심수봉은 같은 해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 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8, 대학생의 자격으로 제2 MBC 대학가요제에 명지대생으로 참가한 심수봉은 자신이 직접 작곡과 작사를 한그 때 그 사람으로 당시 배철수, 노사연, 임백천 등 쟁쟁한 참가자들과 경쟁하였다. 심수봉은 참가했던 가요제에서 입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학가요제에서 최초로 트로트 장르로 출전한 이색적인 경력으로 대중들에게 주목받았고 자신이 공부했던 재즈 음악이 아닌 트로트로 처음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3. 청와대 연예인

심수봉은 1975년에 처음으로 청와대 연회에 초청받아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대통령과의 첫 대면에서 중학교 때 첫사랑인 가정교사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일본 가수 미소라 히바리 슬픈 술을 첫 곡으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연회에 일본 가수를 데려온 줄 알고 처음에는 언짢아 하였다가, 그녀가 곧이어 눈물젖은 두만강, 황성옛터를 부르자 그제야 한국 가수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다고 한다.

 

데뷔 이후에도 줄곧 청와대 연회에 초청되었던 심수봉은 자연스레 청와대 측근들과도 면식이 생기게 되었다. 10.26 사건 당일 궁정동 대통령경호관 대기실에 들어갔을 때도 평소 지면이 있던 대통령경호실 경호부처장 안재송을 알아보았다.

 

10.26 사건 당일날 집에 있던 심수봉은 며칠 전 처음 만났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로부터 다짜고짜 호출 연락을 받게 된다. 저녁 '쇼쇼쇼' 프로 스케줄이 있어서 처음에는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박선호가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일거리로 연예인들 공연이 있다는 것으로 알아듣고 승낙을 하게된다. 공연을 위해 흑석동에서 기타를 구하다가 약속시간 장소에 늦게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재순과 합류하며 함께 궁정동으로 향하게 된다.[8] 이때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로 간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박정희를 기다리게 하는 행동은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수봉은 이미 예전부터 청와대를 자주 오가며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관들과도 이미 직접적인 안면이 있었던 청와대 연예인이었다. 며칠 전에 처음 만났던 박선호가 왜 당일 스케쥴까지 바꿔가며 그녀를 고집했는지, 왜 익숙했던 대통령 방문을 굳이 비밀로 하였는지, 왜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면서 까지 심수봉을 암살 현장에 데려오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4. 10.26 사건 이후

데뷔와 동시에그 때 그 사람으로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심수봉은 데뷔 전 청와대에 초청되었던 인연으로 박정희는 연회 때마다 심수봉을 초청하여 한동안 청와대 연회가 주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1979년에 궁정동 연회장에 초청되어 노래를 부르던 심수봉은 10.26 사건에 휘말렸다. 수사 진행에 참석하면서 무죄로 판결이 났지만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방송금지조치를 당하고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등 갖은 핍박을 당해야만 하였다. 가수로 활동할 수 없었던 심수봉은 1980년에는 처음으로 영화아낌없이 바쳤는데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고 영화 주제곡 OST도 직접 만들고 불렀다. 심수봉의 복귀작으로 화제의 중심이 된 영화아낌없이 바쳤는데는 개봉 이후 관객 5만명을 돌파하는 흥행몰이에 성공했고, 홍콩으로 수출까지 성사되었다.

 

또한, 1979년에는 드라마순자의 가을주제곡 OST순자의 가을도 직접 만들어 불렀다.순자의 가을이라는 곡은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1980년 전두환정권이 출범하자, 노래 제목에 영부인의 이름 '순자'가 나온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 조치를 당했다. 1983년 후배 가수 방미가 이 노래의 제목을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변경하고 가사 일부를 수정해 인기를 모았다.

 

1984년 방송 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그 때의 아쉬움을 달래려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라는 제목으로 다시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1984년에 가요계에 복귀한 뒤 가정문제로 침체기에 빠졌던 상황에서 직접 작곡, 작사한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수록된 앨범이 외설시비에도 불구하고[12][13], 2만 여장이나 팔리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심수봉은 다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1985년 발표한무궁화라는 곡도 히트하였지만 가사가 시대적 상황에 국민을 선동하는 뜻이 있다고 여겨져 방송 하루만에 금지 조치를 당했다. 다른 가수들보다 직접적인 정치적 탄압을 많이 받아 가수활동에 지장을 많이 받았던 심수봉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을 음악에 표현하면서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슬프고 애절한 곡들을 많이 불렀다.

 

5. 민주화 이후

1987년에 정통 트로트사랑밖엔 난 몰라를 발표하였으며 특히 이 곡의 가사가 사랑받고 싶은 여성의 마음을 담은 노래이기도 해서 여성들에게 널리 불렸다. 1997년에는 알라 푸가초바의 같은 뜻을 가진 제목의 러시아어 노래를 한국어로 번안하고 새로운 멜로디로 편곡한백만송이 장미가 히트하였다.

 

2005, 전국투어콘서트를 진행하던 심수봉은 이혼 때문에 자신의 딸과 헤어졌던 사연을 담은아이야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국민가수라 불리고 있는 심수봉은 자신의 음반을 제작할 때마다 새로운 노래를 직접 만들어서 수록했었는데 거의 대부분의 히트곡은 심수봉이 작곡하고 작사한 작품이다. 이와 같은 음악적 재능을 겸비한 심수봉은 대한민국 가요계 제 1세대 여성 싱어송라이터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2011년 이후에는 방송보다는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였다.

■가족

증조부 - 심팔록 (沈八綠, 피리 명인, 가야금 명인, ? ~ 1883)

조부 - 심정순 (沈正淳, 판소리 중고제 대가, 가야금 명인, 1873 ~ 1937)

조모 - 윤용 (1883 ~ 1933)

당숙 - 심상건 (沈相健, 가야금 명인, 가야금 산조의 제1세대 명인 심창래의 아들, 1889 ~ 1965)

당숙 - 심사건 (판소리 인간문화재)

숙부 - 심재민 (1909 ~ ?)

 - 심재덕 (沈載德, 민요수집가, 1899 9 26 [음력 8 22] ~ 1967)

 - 장형복 (1925 ~ )

전모 - 임순덕

고모 - 심혜영 (심매향, 조선권번과 대정권번의 이름난 예기, 1907 ~ 1987)

고모 - 심화영 (沈嬅英, 충남 무형문화재, 승무 인간문화재, 판소리 명창, 1913 9 4 [음력 8 4] ~ 2009 11 17)

이복 큰언니 - 심인숙

이복 작은언니 - 심현숙

이복 막내언니 - 심의숙

이복 오빠 - 심현구

동복 남동생 - 이상민

동복 여동생 - 이상나

남편 - 김호경

 - 한승현

 - 김규현

 - 박성희

당질 - 이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