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ssiah Will Come Again / Gary Moore 연주
The Messiah Will Come Again. 블루스 락에 기반을 둔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의 기타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연주곡이다. 이 곡 원래 블루스 락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미국 출신의 기타리스트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의 대표곡 중 하나이다. 로이 부캐넌은 알콜 및 약물 중독에 시달리다 1988년 8월 공공 장소에서 만취 상태로 소란을 피운 혐의로 체포돼, 몇 시간 후 유치장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 마흔 아홉 나이에 세상을 뜬 비극적인 뮤지션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게리 무어는 이 불세출의 기타리스트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이 곡을 리메이크해 그 이듬해인 1989년 자신의 앨범 After the War에 올린다.
- 본명 Robert William Gary Moore
- 출생 1952년 4월 4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 사망 2011년 2월 6일(58세), 스페인
- 국적 영국
- 직업 음악가, 프로듀서
- 장르 블루스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블루스, 재즈 퓨전
- 악기 보컬, 베이스 기타, 하모니카, 건반 악기
- 활동 1970년~2011년
■블루스에 푹 경도된 북아일랜드 출신 청년
개리 무어는 1952년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무렵 처음 기타를 잡았고 열네 살 때부터 정식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사한 후 스키드 로우(Skid Row)1) 에 가입해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열여섯 살에 불과했다.
스키드 로우의 해산 이후 1973년 개리 무어는 트리오 체제의 개리 무어 밴드(The Gary Moore Band)를 조직하고 사실상 자신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인 「Grinding Stone」을 발표했다. 1975년에는 존 하이스먼(Jon Hiseman), 돈 에어리(Don Airey), 닐 머레이(Neil Murray), 마이크 스타스(Mike Starrs) 등과 의기투합해 콜로세움 투(ColosseumⅡ)를 결성하고 1978년 해산할 때까지 인상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콜로세움 투는 비록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재즈 록 성향의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어 주목을 끌었는데 그 중심에는 개리 무어의 기타가 있었다. 이 멤버들은 1978년에는 뮤지컬의 귀재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녹음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개리 무어의 커리어를 얘기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씬 리지의 리더 필 리뇨트(Phil Lynott, 1949~1986)이다. 필 리뇨트가 이끌었던 명그룹 씬 리지는 U2의 등장 이전 가장 뛰어나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아일랜드 출신 밴드이다. 개리와 필의 첫 만남은 1968년 스키드 로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 리뇨트 역시 짧았지만 한 때 스키드 로우의 멤버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우정을 쌓기 시작했는데 그 우정이 음악적으로 만개한 것은 1970년대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1978년 발표한 개리 무어의 솔로 앨범 「Back on the Street」에는 불후의 명곡 〈Parisienne Walkways〉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곡은 필 리뇨트의 작품으로 그는 보컬로도 참여해 개리 무어의 기타와 함께 노래하고 있다. 두 사람의 가장 성공적인 합작품인 〈Parisienne Walkways〉는 UK 싱글차트 톱10 히트를 기록했다. 개리 무어는 공연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항상 중간에 연주를 잠시 멈췄다 다음 순간 아주 오랫동안 한 음을 지속하는 장면을 연출하곤 하는데, 기타소리가 애를 끊는 듯한 이 장면은 언제나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한편, 같은 시기 개리 무어는 필 리뇨트의 요청으로 씬 리지에 들어가 「Black Rose : A Rock Legend」의 녹음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 앨범은 UK 앨범차트 2위까지 올랐다. 안타깝게도 필 리뇨트는 1986년 서른여섯의 나이에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친구를 잃은 개리 무어의 충격은 컸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누구보다 서럽게 오열했으며 그 후 한동안 기타를 잡지 못했을 정도였다.
친구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1987년 발표한 앨범 「Wild Frontier」에서 다시 한 번 강렬하게 폭발한다. 앨범의 뒷 재킷 하단에 씌여진 'For Philip'이라는 문구가 이것이 필 리뇨트에게 바쳐진 앨범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수록곡 가운데 〈Johnny Boy〉에서는 아예 "위클로우 산을 건너 불어오는 바람소리에서 나는 자니(필 리뇨트의 애칭)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라고 노래하고 있다. 아일랜드 전통음악인 켈틱음악의 애잔한 선율이 깔린 이 곡과 함께 대중적으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너무나 멋진 기타 연주곡인 〈The Loner〉에서 개리 무어가 토해내는 깊은 슬픔은 절절하고 비통하다.
1980년대 들어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결성했던 지포스(G-Force)의 짧은 활동을 마무리한 개리 무어는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이어갔다. 먼저 1982년 발표한 앨범 「Corridors of Power」에서는 〈Falling in Love with You〉와 〈Always Gonna Love You〉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84년에 발표한 「Victims of the Future」는 개리 무어가 한국팬들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앨범이다. 히트곡 〈Empty Rooms〉와 함께 수록된 〈Murder in the Skies〉가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KAL기 참사를 다룬 곡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개리 무어는 자신의 음악적 뿌리였던 블루스로 회귀했다. 「After the War」(1989)에서는 로이 뷰캐넌의 원곡 〈Messiah Will Come Again〉을 훌륭하게 리메이크해 냈고, 걸작 앨범 「Still Got the Blues」(1990)가 뒤를 이었다. 「Still Got the Blues」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음악인생의 정점에 있는 앨범이다. 앨범은 블루스 고전의 커버곡과 개리 무어의 오리지널 작품을 반반씩 수록하고 있는데, 블루스의 두 거장 앨버트 킹과 앨버트 콜린스(Albert Collins, 1932~1993)가 참여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특히 〈Oh Pretty Woman〉에서 보여주는 앨버트 킹의 깁슨 플라잉 브이와 개리 무어의 깁슨 레스 폴의 경연은 가슴 찡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개리 무어 자신인 듯한 소년이 좁고 어두운 방안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사진을 담은 앨범 커버도 흥미롭다. 벽에 걸려있는 사진 속에서 소년과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지미 헨드릭스이다. 「Still Got the Blues」를 기점으로 개리 무어는 음악적 외도를 끝내고 블루스로 되돌아갔다. 그는 말했다. "록큰롤은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죠. 이 앨범은 영원한 블루스와 위대한 블루스맨들에게 바치는 헌사입니다"
■록큰롤은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개리 무어가 영향 받은 뮤지션을 꼽으라면 당연히 블루스맨들을 맨 앞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다. 훗날 함께 연주도 하게 되는 블루스의 거장 앨버트 킹과 비비 킹, 그리고 블루스 록의 영웅 지미 헨드릭스와 존 메이욜 역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단 한 명이라면 그것은 피터 그린이다. 플리트우드 맥의 기타리스트였던 피터 그린은 개리 무어가 처음 더블린에서 연주할 때부터 멘토와도 같은 역할을 했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개리 무어는 1995년 피터 그린에게 바친 트리뷰트 앨범인 「Blues for Greeny」를 통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는데 이 앨범은 온전히 피터 그린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개리 무어가 주로 사용하는 기타는 깁슨 레스 폴 스탠더드 모델이다. 일찍이 피터 그린은 레스 폴 스탠더드 1959년형 기타를 개리 무어에게 빌려주었는데, 그가 플리트우드 맥을 떠날 무렵 이것은 온전히 개리 무어의 것이 되었다. 피터의 요구로 개리가 이 기타를 완전히 사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피터 그린은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도록' 개리 무어에게 기타를 사줄 것을 간곡히 요구했다고 하는데, 그 때 사들인 레스 폴 스탠더드 1959년형 기타는 개리 무어의 필생의 명기가 되었다. 위에서 말한 「Blues for Greeny」 앨범 녹음 당시에 사용한 것도 바로 이 기타였다.
다양한 연주 기법 중에서도 초킹은 단연 그의 트레이드마크인데 공연장에서 〈Parisienne Walkways〉 연주시에 보여주는 한 음 초킹은 때로 1분 가까이 지속될 만큼 경이로운 것이었다. 개리 무어의 기타는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어느 헤비메탈 기타리스트보다도 육중하고 강력한 사운드로 무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수많은 기타리스트들 가운데서도 아주 독특한 느낌의 연주를 들려주는데 그 중심에는 '슬픔'이 있다. 그의 기타만큼 슬피 우는 기타는 없다. 아쉽게도 이제 더 이상 개리 무어의 슬픔 가득한 연주를 다시 들을 수는 없다. 2010년 역사적인 첫 내한공연을 마친 이듬해인 2011년, 개리 무어는 여자친구와 함께 투숙했던 스페인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위대한 기타리스트를 뽑아 놓은 어떤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개리 무어의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다. 단언컨대 그의 기타만큼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던 기타소리는 없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밤 〈Still Got the Blues〉 〈Parisienne Walkways〉 〈Messiah Will Come Again〉을 듣다 눈물 흘렸을 이가 어디 한둘이랴? 그는 분명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기타리스트였다.
한 때는 강력한 헤비메탈 기타 사운드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개리 무어의 기타 연주는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 머나먼 땅 아메리카에서 고달픈 노예생활을 해야 했던 흑인들의 한이 서린 음악 블루스, 블루스는 뿌리부터 슬픈 음악이고 개리 무어는 그 슬픔을 가장 절절하게 표현해냈던 기타리스트이다. 그의 기타가 머금은 깊은 슬픔은 아마도 그가 현대사에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벌어진 참혹한 비극을 간직한 도시인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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