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내곁에 / 김현식 (1991)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시간은 멀어 집으로 향해가는데
약속했던 그대만은 올 줄 모르고
애써 웃음 지으며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도 낯설고 멀기만 한지
**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곁에 있어줘
이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
〈내사랑 내곁에〉는 1991년에 김현식이 발표한 대한민국의 대중가요이다. 오태호가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이다. 김현식 사후에 발표된 노래이며, 1991년 제6회 골든 디스크 대상을 수상한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1988년에 당시 신촌블루스에서 기타연주를 맡았던 오태호가 가사를 쓰고 곡을 써놓은 상태였다. 노래를 만들고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는데 이를 들은 김현식이 마음에 든다며 자신에게 곡을 달라고 하여 승낙을 하였다.
1990년 3월에 '넋두리'를 타이틀곡으로 한 5집 앨범을 발표한 후 김현식은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 김명수와 함께 6집 녹음에 들어갔다. 이 노래는 정식 녹음을 앞두고 가녹음해 놓은 상태로 되어 있었는데, 6집 음반 작업을 마쳐 가던 1990년 11월 1일에 김현식이 사망하는 바람에 가녹음 상태로 된 노래가 음반에 실리게 되었다.
이 노래가 수록된 김현식의 6집 앨범은 1991년 2월에 발표 후 1991년에 5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그 해 음반업계의 최고의 수확으로 꼽혔고, 노래는 그 해 연말 크리스마스 캐롤보다 더 많이 불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그 해 제6회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시간은 멀어 집으로 향해 가는데’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노래를 작사한 오태호에 따르면, ‘멀어 집으로’가 아닌 ‘멀어짐으로’인데 가수가 잘못 부른 것 같다고 하였다.
- 출생 1958년 2월 18일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 사망 1990년 11월 1일 (향년 32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아파트 자택
- 묘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 메모리얼파크
- 원적 충청남도 홍성군
- 신체 171cm, 71kg, A형
- 자녀 아들 : 김완제
- 학력 서울수유국민학교 (졸업)
보성중학교 (졸업)
명지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대한민국의 가수. 유재하, 이문세, 조용필, 이선희, 변진섭, 전영록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상징 중 하나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발전시키고 수면 위에 올린 전설적인 인물이다.
■어린 시절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할아버지 역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또 외할아버지 역시 만석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1964년생)이 있다. 1964년에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외가인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죽향초 동창의 말에 의하면 이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5학년 때 서울에 있는 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삼청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당연한 소리지만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1970년에는 서울보성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다. 사촌형인 양국정이 기타를 가르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부터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전교 3등으로 입학했고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선배의 악기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하자 이에 대들어 뒤엉켜 싸운 사건으로 밴드부에서 탈퇴를 당하게 된다. (김현식은 싸움을 아주 잘했다고 한다. 몸 체질 자체가 통뼈이고 두꺼워서 불주먹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초에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여담인데 1972년(당시 중3) 기타만 들고 인천 작약도로 친구인 김동환과 같이 음악 여행을 떠났고 3년 뒤에 둘이 다시 음악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상당히 방황을 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동네 "건달" 김현식이라고 불렸다 한다. 이 시기에 기타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인생의 전환점이라 볼 수 있는 시기이다.) 바로 이 당시에 사촌형 양국정의 소개로 종로에서 당시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에서 일하던 한 DJ를 찾아가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DJ는 바로 당시 20대 중반이던 개그맨 전유성이었다. 전유성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어린 김현식이 부른 노래에 감탄하며 "넌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아까워. 그야말로 가수로 나가면 전설이 될 거다!"라며 적극적으로 가수가 되길 권유했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때 나이를 5~6살은 올려 소개했다고. 이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이때 이장희의 남동생 이승희를 만나게 된다.
■사망
결국 1990년 11월 1일 오후 5시 20분에 자신의 자택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아파트에서 간경화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누나인 김혜령이 임종을 지켰다.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전날 각혈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 그리 빨리 뜰 줄은 몰랐으며 당일 불과 2시간 전인 오후 3시경에 김현식이 전화로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얘기해서 전혀 짐작도 못했다고 한다.
다음 날 그의 누나에게 "갔어요."라고 한 마디로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이때 김현식은 겨우 32살이라는 한창 젊은 나이였다. 2010년 김현식 2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에 나온 김영 사장이 회상하길, 전화를 받고 믿기지 않아서 "그럴 리가 없어! 어제 겨우 두 시간 전에 현식이가 나한테 밝게 전화하면서 내일이라도 녹음 들어간다고 했다고! 그런데 현식이가 죽었단 말이야?!"라면서 소리쳤을 정도로 충격받았다고 한다.
김혜령은 선배였던 한영애를 찾아가 "언니... 현식이 갔어요."라고 말한 얘기에 한영애는 "스튜디오 왔다 갔다고요? 근데 그게 왜요?"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갔다구요, 저 하늘로..."라고 다시 얘기했는데, 이때 온몸에 힘이 풀리며 쓰러졌다고 한다.
사후 그는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가 경기도 성남시 야탑3동에 위치한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된다. 그의 묘비에는 1집 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의 가사와 할머니란 가사가 적혀있다.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를 제외한 실질적 유작인 5집 앨범 '넋두리' 앨범이 바로 이때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 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다. 김영 사장이 포기하자는 말에도 각혈을 하면서 죽어갈 때까지 엄청난 유작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후일담
그의 유작이 된 6집 <내 사랑 내 곁에>는 100만장이 넘게 팔리는 대박을 거둬들였으며 가요톱텐 1991년 12월 25일 방송분에서 골든컵을 탄 김정수의 <당신>과 같이 공동 수상을 했다. 다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은 그의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했다.
1991년 골든디스크 대상을 차지했고 어머니와 아들 완제군이 수상을 했다. 원래 이 때 신인 시절의 김장훈이 무대에 설 예정이었는데, 이에 대해 소속사 측에서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난(실제 사촌인 것은 아니다) 김장훈을 내세우면 대박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하지만 김장훈은 그를 팔아먹으며 인기를 노린다는 부분을 영 내키지 않아 했고, 그래서인지 아예 생방송을 펑크내버렸다. 결국 위에 서술된대로 김현식의 아들인 김완제가 대리 수상을 하게 됐고 이 일로 김장훈은 한동안 방송금지를 당했다고.
'음악 > 대중가요,가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빛이 내린다 - 안녕바다 (0) | 2022.07.24 |
---|---|
무인도 - 김추자 (0) | 2022.07.23 |
밤에 창가에서 - 신지훈 (0) | 2022.07.22 |
그대 먼 곳에 - 마음과 마음 (0) | 2022.07.22 |
내마음 당신 곁으로 - 김정수와 급행열차 (0) | 2022.07.22 |